[취재수첩] 취객 폭력에 노출된 응급실 의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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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표 지식사회부 기자 rickey@hankyung.com“병원 응급실은 그 나라 의료시스템의 수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창(窓)과 같아요. 술 취한 사람들이 응급 환자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게 한국 응급실의 현실이죠.”(국립중앙의료원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지난 23~26일 늦은 밤과 새벽 시간에 서울 시내 응급의료센터를 취재하던 중 들은 얘기다.경 찰은 서울 지역에서만 운영하던 ‘주취자 원스톱 응급의료센터’를 전국 6개 광역시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지난 23일 내놓았다. 주취자 원스톱센터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취객을 경찰과 119구급대가 지정된 병원 응급실로 데려오면 의료진이 보호하고 치료하는 제도다.
경찰 관계자는 “3년간 1만5000여명의 주취자를 보호했을 정도로 성과가 좋아 확대 시행을 검토하게 됐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응급 환자들과 취객들을 한군데서 보호하는 데 따른 부작용은 없는지 궁금했다.
현장에서 목격한 주취자 원스톱센터는 ‘성공한 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친 얼굴의 의료진들은 “지금 상황은 경찰이 귀가조치하기 어려운 취객들을 병원 응급실에 떠맡기는 것일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한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지난 4월 술 취한 환자에게 얻어맞아 경찰서에서 피해자 조사를 받을 때도 경찰청에선 아무 말도 없었다”며 “참다 못해 청와대 신문고에 민원글을 올리자 그때서야 부랴부랴 글을 내려달라고 사정하기만 했다”고 털어놨다. 글을 내려주는 대신 매주 한 번씩 방문해 주취자 원스톱센터 운영을 돕고 병원에 상주하고 있는 경찰관들의 근무 태도를 점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나중에 흐지부지됐다고 전했다.
만취한 사람은 각종 범죄와 사고에 노출돼 있어 이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의료진이 진단해야 한다는 취지도 맞다. 하지만 취객의 행패를 제어할 수단 없이 술 취한 사람과 중환자를 한군데서 치료하는 것은 응급실 기능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
“지난 3년간 드러난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고 제도를 확대하기만 한다면 6개 도시의 응급의료시스템도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는 20년차 응급의학과 전문의의 말을 경찰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홍선표 지식사회부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