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일주여행] '절벽 위의 다섯 마을' 사이로 짙푸른 지중해가 한눈에…중세 유럽 '눈이 즐거워'

산지미냐노·몬테카티니·베로나·카프리 섬
해안 절벽을 따라 다섯 개의 마을로 이뤄진 친퀘테레의 동화같은 풍경. ‘신의 색깔’이라는 아청빛 하늘색과 지중해의 물빛 사이로 파스텔 톤의 집들이 층층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나는 와인 맛도 일품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이탈리아의 하늘은 짙푸른 지중해 물빛을 닮았다. 햇살이 사금파리처럼 부서지는 바다 위로 파란 물감을 들이붓는 여인 같다. 누가 ‘신의 색깔’이라고 했을까. 그냥 파랗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짙은 군청색과 맑은 푸른색을 섞은 아청빛 색감의 묘미. 이탈리아어 ‘아주로(azzuro·하늘색)’ 말고는 달리 형용하기 어렵다. 축구팀 유니폼도 그 색깔이어서 ‘아주리 군단’이 아니던가. 괴테가 ‘저 레몬꽃 피는 나라/ 그늘진 잎 속에서 금빛 오렌지 빛나고’라고 찬탄하며 그토록 반했던 게 이해가 간다.

이탈리아에서 여드레를 보내는 동안 하루도 흐린 날이 없었다. 겨울이 우기이지만 고맙게도 날마다 쾌청했다. 하늘과 바다에서 동시에 터지는 아청빛 색채의 향연. 그 절정을 바닷가 절벽에 자리 잡은 해안 마을 친퀘테레에서 먼저 만났다.절벽 위의 다섯 마을 친퀘테레

친퀘테레(Cinque Terre)는 이탈리아어로 ‘다섯 개의 땅’을 뜻하는 해안가 절벽 마을이다. 중북부 서해안을 따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5개 마을이 그림처럼 이어져 있다. 남쪽 마을 리오마조레를 시작으로 마나롤라, 코르닐리아, 베르나차, 몬테로소 알 마레를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걸어서도 다섯 시간이면 거뜬하다.

두 번째 마을인 마나롤라에 들어서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바다 쪽에서 올려다 본 마을은 마치 남해의 다랑이논을 옮겨놓은 듯했다. 바위투성이의 가파른 지형에 빼곡하게 지어올린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집과 카페. 몇 세기 동안 외부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요새를 강화하고 방어벽을 세우며 조성한 마을이다. 대부분이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했을 테니 가난은 피할 수 없었으리라. 그런 궁핍 속에서도 어부들은 바다에서 일하는 동안 자기 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멋진 색으로 외벽을 칠했다고 한다.이곳의 진경을 보려면 해안 산책로인 센티에로 아주로(Sentiero Azzuro·하늘색 산책길)로 내려가는 게 좋다. 다섯 마을로 연결되는 이 길에서는 어디를 찍든지 작품이 된다. 사방이 그야말로 ‘신의 색깔’로 물들어 있다. 산 중턱에 펼쳐진 계단식 포도밭과 올리브밭 풍광도 좋다. 이곳 포도로 만드는 와인은 친퀘테레와 샤케트라 두 종류다. 바위에 와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작은 카페에서 샤케트라 한 잔을 주문했다. 연한 황금빛이 가미된 백포도주. 밀도있는 미감에 둥근 단맛이 입안 가득 번진다.

피렌체에서 기차로 약 두 시간. 라스페치아역에서 다섯 마을을 순회하는 완행열차를 타고 아무 데서나 내려 돌아볼 수 있다. 아기자기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숙소도 여럿 있다. 최근 들어 ‘한 달 동안 살고 싶은 유럽’ 1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등에 잇달아 꼽혔다. 그러나 여행지로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아직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여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마을에 머물 때마다 단편소설 한 편씩을 쓰고 싶어지는 곳, 속으로 아끼고 아낀 밀어를 꺼내 밤새도록 사랑의 시를 쓰고 싶어지는 그런 곳이다.

아름다운 탑의 도시 산지미냐노
평화로운 산지미냐노의 오후. 광장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싱그럽다.
산지미냐노는 피렌체 남쪽 56㎞ 지점의 델사 계곡에 있는 중세 도시. 1000년 전부터 무역과 성지순례길로 번성을 누린 곳이다. 귀족 가문들이 부와 권력을 자랑하기 위해 탑 같은 고층 건물 72채를 세웠는데 이 중 14채가 남아 있다. 집의 평균 높이는 3~4층이지만 탑의 높이는 10~12층이나 된다. 높은 망루랄까, 도심의 주차타워랄까. 꼭대기에 종루가 있는 탑도 있다.

탑에 오르면 평온한 토스카나 들판 사이로 짙은 오렌지색 지붕을 이고 있는 중세 마을의 풍경이 엽서처럼 펼쳐진다. 붉은빛의 낡은 벽돌과 그 사이를 감고 올라간 담쟁이덩굴, 성벽 틈새에 핀 야생화와 반들반들 닳은 돌길, 좁은 골목들과 탁 트인 광장이 고대 유적지를 방불케 한다. 살아있는 과거다. 광장 앞 성당에는 14, 15세기 걸작도 걸려 있다.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에서는 혼자만의 여유를 누리며 오후의 햇살을 천천히 음미하는 게 좋다. 오래된 우물이 있는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 와인을 주문한다. 토스카나의 태양이 빚은 포도주. 이곳 특산 와인 베르나차 디 산지미냐노의 향미가 일품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맛있는 젤라토를 파는 집도 이곳 광장에 있다. ‘중세 유럽을 가장 잘 보존한 도시’ ‘포도밭과 올리브 숲으로 둘러싸인 동화 도시’ ‘세계적인 젤라토가 있는 달콤한 도시’ 등 산지미냐노를 수식하는 낭만 표어는 끝이 없다. 유럽에서 중세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이곳 역시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온천 휴양도시 몬테카티니 테르메

또 하나의 ‘숨은 보석’은 산골 마을 몬테카티니 테르메다. 온천을 뜻하는 지명 테르메(terme)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온천 도시다. 1530년부터 온천장과 리

트가 본격적으로 들어섰으니 역사가 500년 이상이다. 200여곳의 호텔을 중심으로 온천, 미용, 패션, 관광산업이 발달했다.

베르디가 작곡을 하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어서 가장 넓은 도로에는 베르디 이름이 붙어 있다. 밤 산책길에 베르디 거리를 천천히 걷다 보면 ‘아이다’와 ‘레퀴엠’ 선율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카페에 앉아 차나 와인을 주문하면서 베르디를 듣고 싶다고 청해도 좋다. 사람들은 다정하고 낙천적이다. 음식 인심만큼이나 칭찬 인심도 좋다.

치즈 또한 유명하다. 230여년의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 수제 리코타 치즈케이크 ‘보니 베니에로’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농장을 경영하던 카를로 보니가 소와 양의 젖에서 나온 소량의 치즈를 모아 발효시킨 리코타 치즈로 이탈리아 전통 방식의 케이크를 만든 게 시초라고 한다. 깊고 풍부한 리코타 치즈의 풍미를 곳곳에서 맛볼 수 있다.
베로나 도심에 있는 아레나.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원형 경기장이다. 로마시대에 검투사들의 피로 물들었던 경기장은 야외 오페라 극장으로 바뀌어 수많은 관광객을 유혹한다.
줄리엣과 베로나·비첸차

베로나는 ‘줄리엣의 집’으로 유명한 도시다. 그러나 정작 상징물은 따로 있다. 약 2000년 전에 세워진 원형경기장 아레나다. 로마의 콜로세움, 카푸아의 원형경기장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크다. 로마시대부터 검투장 등으로 쓰이다 한때 폐허가 된 것을 20세기 초반 야외 오페라 극장으로 되살렸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여름철 오페라 축제에는 세계에서 관람객이 몰린다. 오페라를 보기 위해 아레나를 찾는 관광객은 연간 120만명, 오페라로 얻는 직접 수입만 연 1억유로에 육박한다.

카펠로 거리에 있는 줄리엣의 집은 젊은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마당에 서 있는 줄리엣 동상의 오른쪽 젖가슴은 워낙 많은 사람이 만져서 반들반들 빛난다. 줄리엣의 가슴을 만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거나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줄리엣이 살았던 집이라는 증거는 없다. 이웃 도시인 비첸차는 줄리엣의 집이 자기네 도시에 있다고 주장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비첸차의 귀족인 루이지 다 포르토가의 로메오 몬테키와 줄리에타 카팔레티에 관한 민간설화에서 나왔으니 이런 논쟁이 벌어질 만도 하다.

괴테는 베로나 여인들의 피부는 희지만 윤기가 부족한데 비첸차 여인들의 피부는 탄력이 있고 건강미가 넘친다고 했다. 그런 걸 두고도 양쪽 사람들은 서로 줄리엣이 자기네 처녀라고 강변한다. “거 봐. 우리 동네 처녀잖아!”

팔라디오가 설계한 비첸차의 올림피코 극장.
비첸차는 베로나에서 동쪽으로 11㎞ 떨어진 곳에 있다. 16세기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설계한 건축물들로 유명하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지붕 덮인 실내극장’ 올림피코 극장이 특히 눈길을 끈다. 평일에 찾아서인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아 한가하게 둘러볼 수 있다.

대문호들이 ‘돌로 쌓은 그리스의 꿈’이라고 극찬했던 건축물들이 이 도시에 몰려 있다. 인기 드라마 ‘아테나’에서 정우성과 김민종이 시내에 처음 들어서는 모습과 대통령 딸로 나오는 이보영을 만나는 장소로도 화제를 모은 곳이다.
로마 황제들의 별장지였던 카프리섬. 리프트를 타고 정상으로 오르면서 하얀 집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특별하다.
낭만 가득한 소렌토·카프리

‘돌아오라 소렌토로’로 유명한 항구도시 소렌토의 한적한 골목.
소렌토는 인구 2만명 정도의 작은 항구도시다. 이탈리아 작곡가 에르네스토 데 쿠르티스가 작곡한 ‘돌아오라 소렌토로’로 유명한 곳. 파바로티의 맑고 깨끗한 음색이 도시 전체에 울려퍼지는 듯하다. 이렇다할 유적지 하나 없이 노래 한 곡만으로 세계인을 불러 모으는 게 신통하다. 그러나 괴테를 비롯해 영국 낭만파 시인 바이런과 미국 시인 롱펠로 등 세계적인 문호들이 이곳에서 영감을 얻어갔다. 작은 광장에는 소렌토가 자랑하는 시인 토르콰토 타소의 동상과 기념비도 보인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조금만 가면 카프리 섬에 닿는다. 과거 로마 황제의 별궁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세계적인 부호와 스타들의 별장이 있다.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의 허니문 여행지로 알려져 더 사랑받는 섬. 아랫마을엔 레스토랑과 상점이 많고 윗마을엔 하얀 집들과 성당이 있다. 리프트를 타고 오르면서 내려다보는 모습이 절경이다. 한쪽으로는 나폴리 항구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슬로시티의 원조 오르비에토

로마에서 96㎞ 떨어진 오르비에토는 1999년 세계 최초로 슬로시티 운동을 시작한 곳. 도시 외곽에 있는 밭에서 유기농 채소와 과일을 재배해 먹고 레스토랑에서도 텃밭 채소를 준다. 아기자기한 골목길도 중세풍이다. 그런 슬로시티의 중앙에 이탈리아에서 가장 화려한 문양을 지닌 두오모가 있으니 뜻밖이다. 루카 시뇨렐리의 ‘최후의 심판’도 감상할 수 있다. 이곳만큼 느림의 미학을 즐길 수 있는 곳도 없을 듯하다. 두오모 광장 한 쪽에서 햇볕을 받으며 평화롭게 노는 고양이 몇 마리가 정겹다. 그 위로 앙증맞은 햇살 조각을 튕겨내는 아청빛 하늘이불이 사각대는 풍경도 살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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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퀘테레(이탈리아)=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