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복지정책 산증인 차흥봉 사회복지협의회장 "국민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복지는 환상에 불과"

83년 의보통합 주장하다 퇴직
98년 장관 맡아 통합 마무리
“국민들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복지는 환상입니다. 불가능해요.”

차흥봉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세계노년학회장(73·사진)의 말이다. ‘무상복지’ 등 달콤한 정치권의 구호가 결국 연말정산 대란 등 국민 세 부담으로 귀결되는 현실에서 차 회장은 “복지는 국민 개개인의 책임과 국가의 책임이 결부될 때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차 회장은 이른바 4대 사회보험(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의 산증인이다. 1942년 경북 의성군 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면서 ‘사회를 바꿔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당초 언론인이 되고 싶었으나, 대학 은사의 조언으로 교수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대학원 재학 시절 우연한 계기로 인생행로가 다시 바뀌었다. 새마을운동을 기획하고 전파하기 위해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특채한 자문교수단의 보좌관(행정관)으로 청와대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행정관 근무를 마칠 때쯤 앞으로 일할 정부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그는 보건사회부를 택했다. “내무부 재무부 등 유력 부서를 왜 안 갔느냐고 가족과 친척들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었어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잘사는 나라를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과 씨름한 탓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 회장은 1976년부터 8년간 보건사회부에서 보험제도과장 등을 맡아 태동 시기의 한국 복지정책 실무를 책임졌다. 그러나 일에 너무 매진한 탓에 위기가 찾아왔다. “조합 방식의 의료보험 체제로는 농촌 등 취약지역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의료보험 통합을 강하게 주장하다 군부, 재계 등 조합 지지층에 밀려 1983년 2월 공직에서 강제로 쫓겨났어요.” 그는 이를 ‘복지 1차 전쟁’이라고 회상했다.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지내던 그가 다시 공직에 돌아온 건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1998년이다. ‘1차 전쟁’을 주도했던 열정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아 공무원·교원의료보험공단과 지역의료보험조합의 통합을 추진해 20여년간 끌어온 건강보험 통합을 마무리했다. 최저생계비 개념을 제시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만들어진 것도, 국민연금 등 4대 보험의 골자가 완성된 것도 이때쯤이다. 그는 그러나 이 모든 업적이 ‘시기가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복지는 사회의 바탕이 가장 중요합니다.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죽었다 깨나도 못 해요. 1960년대부터 쌓여온 국부(國富)의 잠재력이 이때서야 드러난 겁니다. 또 민주화 등 사회 구조가 변화하면서 여러 문제가 생겨나고, 이를 해결할 정책에 대한 국민들 갈망이 컸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는 도처에서 커진 복지 수요의 압박을 ‘복지 2차 전쟁’이라고 불렀다.차 회장은 한국 사회의 복지가 글로벌 수준에 비교할 때 ‘7부 능선’에 올라타는 시기라고 했다. “복지는 ‘인간’을 위한 것이지 국민을 구호의 대상, 거지로 만드는 게 아니다”며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지고, 일할 사람은 하고, 그럴 수 없는 사람은 적당히 받는 것이 복지다. 기계적인 평등이 아니라 선별적 복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