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 "美 유학파·외국계은행장 13년…탄탄대로만 걸어온 수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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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1등 한번 못한 막걸리파…항상 乙의 자세와 끈기로 버텼죠"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62)은 한국씨티은행장으로 10년, 한미은행장으로 3년을 일한 한국 금융시장의 유명인사다. 하지만 오랜 기간 주목받은 데 비해 의외로 개인적인 면모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수재형’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정도다.
국내 대형 은행들 앞에선 언제나 乙
"외국계 은행 화려해 보이지만 간과 쓸개 모두 내놓은 적 많아"
엄격했던 父 가르침이 극복 원동력
대학 은사 덕분에 갖게 된 금융맨 꿈
씨티은행 입사해 '시장 보는 눈' 키워
파생상품 전문가로 업계서 두각
작년 은행연합회 수장되며 새 도전
하 회장의 얘기를 세 시간여 듣고 보니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다. ‘직업이 행장’이라고 할 정도로 긴 시간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있었지만 그는 ‘갑(甲)’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외국계·중견 은행이라는 ‘비주류’로 국내 대형 은행들과 경쟁하다 보니 늘 낮은 자세의 ‘을(乙)’일 수밖에 없었고,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었다는 설명이다.그는 ‘경기고-서울대’를 나온 이른바 ‘KS파’다. 그렇지만 “학창시절 한 번도 1등을 못해 봤다”고 했다. ‘우수한 두뇌와 다재다능함’이 아니라, 부족한 자신을 채찍질하며 있는 자리에서 항상 최선을 다한 꾸준함이 오늘의 그를 만든 동력이었다.
이처럼 하 회장이 풀어낸 얘기는 예상과는 꽤나 달랐다. 하긴 ‘인터뷰 장소는 근사한 양식당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부터 빗나갔다. 그는 서울 서대문역 인근 해산물 전문점 동해관으로 기자를 초대했다. “즐겨 찾는 집 중에 양식당은 없다”고 말했다. 동해관은 정감 있는 한옥이지만 음식점 중앙의 마룻바닥을 걸을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구옥이었다. 그는 “소주 한잔 기울이거나 마음 내키면 폭탄주도 돌릴 수 있는 이런 식당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을의 입장으로 살아 가라”첫 음식으로 전복죽이 나왔다. 전복 내장 맛이 구수하게 우러나왔다. 한두 숟갈 뜬 하 회장은 “박철 전 한국은행 부총재가 10년 전쯤 알려준 식당”이라고 소개했다. 1인당 2만~4만원의 합리적 가격에 산지에서 바로 올라온 갖가지 제철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음식 맛도 맛이지만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방이 있다는 점이 동해관을 낙점한 이유라고 말했다.
소박한 입맛은 선친에게 대물림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금(金) 산지였던 전남 광양에서 광산업을 일으켰다. 유복한 환경이었지만 아버지는 ‘을의 입장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실제로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았는데도 절대 화려한 밥상을 차려주지 않았다.하 회장은 “모두가 어려운 시대에 상대적으로 넉넉한 환경에서 크는 자식이 혹여 나태해질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낮은 자세를 강조한 듯싶다”고 돌아봤다. 그의 아버지는 사회공헌 활동도 열심히 했다. 광양을 대표하는 사곡초등학교를 1935년 설립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인근 절 복원비를 전액 기부하기도 했다.
교육 방식도 엄격했다. 초등학교 때 서울로 이사온 뒤 후암동 집에서 퇴계로 학교까지 남산을 넘는 길을 차를 타지 말고 걸어다니게 했다. 5㎞ 정도의 만만찮은 거리였다. 그는 “당시는 ‘왜 이리 힘들게 하지’라며 아버지께 섭섭한 마음이 있었지만 돌아보니 그런 교육철학이 험한 사회생활을 헤쳐가는 데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30여년을 한국씨티은행에 몸담았던 하 회장은 “외국계 은행이 화려해 보이지만 국내 대형 은행과 경쟁하려면 간과 쓸개를 모두 빼놔야 할 때가 많았다”며 “선친의 가르침이 거친 환경을 견뎌내는 힘이 됐을 것”이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막걸리 운동권파’에서 ‘유학파 MBA’로하 회장이 유년시절 기억을 한창 떠올리던 중 게를 넣고 된장을 연하게 풀어 끓인 찌개가 나왔다. 살과 알로 차 있는 게 몸통을 씹을 때마다 바다 내음이 다가왔다. 그가 얘기를 이어갔다. “저는 모범생은 아니었어요. 학창시절엔 축구에 빠져 운동장에서 지냈습니다. 1등을 한 기억도 없네요.” 결과는 경기중학교 시험 낙방이었다. 중앙중에 입학했다. 어린 나이에 “인생 첫 좌절”을 맛본 것이다.
하지만 이후 명문 경기고와 서울대에 진학했고, 외국계 은행 CEO를 다섯 번 연속 맡았다. 비결이 무엇일까. 일희일비하지 않고 뭐든지 ‘꾸역꾸역’ 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자가진단이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공부할 때도, 일할 때도 시나브로 내실을 쌓아간 게 뒷심을 발휘했다는 설명이다.
서울대 무역학과 재학 때도 여전히 모범생의 생활과는 간극이 넓었다. 책상에 앉아 있기보다 주점에서 막걸리 마시는 일이 더 잦았다. 성적이 나올 리 없었다. 학사경고를 맞고 대학신문에 이름이 실렸다. 학생운동을 하다 성북경찰서 유치장 신세도 졌다. “나중에 정신 차리고 미국 유학을 준비할 때 경찰서에 끌려간 기록 때문에 애를 먹었습니다.”
공부로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국제경제학계의 원로로 꼽히는 홍원탁 교수 덕분이었다. 2012년 타계한 홍 교수는 그 시절 의욕과 실력으로 무장한 30대 소장 학자였다. 당시로선 드물게 홍 교수는 제자들을 호되게 가르쳤다. 수업 후 짧은 시험인 퀴즈를 매주 냈고, 영어 원서를 세 권은 독파해야 진도를 겨우 쫓아갈 수 있을 만큼 학생들을 다그쳤다. “홍 교수님 수업을 듣고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국제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영전문대학원(MBA)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시장을 보는 눈’과 인맥을 준 씨티은행
유학을 마친 하 회장은 1981년 씨티은행 서울지점에서 뱅커(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텔렉스로 국제 시세를 받아보던 시절이었다. 적성을 찾은 그는 자금시장의 흐름을 읽어내는 후각을 자랑하며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1985년 ‘플라자 합의’가 이뤄진 뒤 미국 달러화 약세에 계속 베팅한 결정은 대박으로 이어졌다. “단기간에 승부가 나는 외환파생상품 거래의 짜릿함에 빠져 재미있게 일했다”고 돌아봤다. 그렇게 막 태동한 국내 외환파생상품 1세대 선두주자로 시장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시장에 없는 새 영역을 개척하는 일이니만큼 어려운 점도 많았다. 수출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대규모로 보유 중인 정유사를 찾아다니며 자금을 받아오는 일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낮은 자세로 밤낮 없이 담당자들을 쫓아다닌 결과 자금 운용 규모는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글로벌 금융회사 씨티는 그를 유능한 은행가로 키워냈다. 멘토 격으로 그를 이끌어준 이가 존 리드 당시 씨티그룹 회장이다. 그는 리드 회장이 금융시장을 읽는 남다른 선견지명을 여러 차례 보여줬다며 ‘굉장히 비저너리(visionary·예지력이 있는)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리드 회장은 1980년대에 미국 최초로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상용화했다. 인터넷뱅킹의 등장 등으로 은행 영업점이 짐으로 작용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이미 그 시절 예견하기도 했다.
한국씨티은행장을 지내면서는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 빌 로즈 씨티그룹 부회장 같은 거물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이때 구축한 글로벌 인맥을 통해 하 회장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때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은행산업 새 길 찾기가 내게 주어진 소임”
동해관의 메인 요리 아귀수육이 나왔다. 콩나물과 매운 양념으로 버무린 보통 아귀수육과 달리 고추장을 사용하지 않아 담백하고 탄력 있는 아귀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하 회장은 “가장 맛있는 요리이니 얼른 먹어야 한다”며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렇게 입맛을 다신 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씨티를 비롯한 외국계 은행에 대한 우리 사회 일각의 삐딱한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다는 얘기였다. “한국씨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가장 먼저 달러를 들여와 증자를 단행하며 환율 안정의 단초를 제공했다”며 “국부 유출의 주범으로 몰 때는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
하 회장은 “미국에서 한국 자동차회사가 공장을 짓고 돈을 벌면 기분이 좋지 않으냐”며 “많은 돈을 투자한 뒤 정당한 절차를 밟아 본사에 배당하는 것도 같은 시각으로 봐줘야 한다”고 했다. 특히 국제 간 교역을 통해 성장한 개방경제 체제인 한국이 자본이동을 ‘국부 유출’로만 인식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고 주장했다.
작년 말 은행연합회장에 취임한 하 회장은 세 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은행업에 대한 걱정으로 마무리했다. 저금리 기조와 각종 규제로 은행산업이 위기에 처해 있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는 진단이다. “금융을 실물경제를 도와주는 역할로만 보지 말고,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당당한 산업으로 키워내야 합니다. 오랜 기간 금융시장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으로 그런 날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겠습니다.”
은행연합회는 어떤 곳?
전국은행연합회는 말 그대로 은행들의 연합체다. 1928년 설립된 경성은행집회소가 모체인 전국은행협회를 개편해 1984년 발족한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은행 간 업무 협조 △금융당국 등 외부 조직과의 소통 및 협조 △은행산업 공동 연구 및 업무 개발 △신용정보의 집중·관리·제공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국내 모든 시중은행과 특수은행, 지방은행이 정사원이다. 외국 은행 국내 지점들도 준사원으로 가입돼 있다.하영구 회장의 단골집 동해관 고추장 안 쓴 아귀수육, 담백한 맛 일품
동해에서 나는 질 좋은 해산물을 받아 각종 회와 구이, 찜, 탕을 내오는 해산물 정식집이다. 당일 조달하는 해산물로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특별히 정해진 메뉴가 없다. 날마다 다른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얘기.
주로 나오는 요리는 아귀수육 북어찜 아귀탕 갈치탕 전복회 문어숙회 게찜 대하구이 등이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오래된 한옥의 분위기도 입맛을 더한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보이는 하나은행 건물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가격은 1인당 점심 2만원, 저녁 4만원이다. 찾는 손님이 적잖아 예약을 하고 가는 편이 좋다.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183의 2. (02)363-4221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