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공학과도 연구비 잘 타내는 바이오·나노 전공 교수만 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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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현장서 멀어진 공대 (3·끝) 바람직한 산학협력 방안최근 한국 공과대학은 1970~1980년대에 이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극심한 대졸 취업난 속에 공대 졸업생이 상대적으로 높은 취업률을 보이고 있고, 2000년대 들어 ‘이공계 위기론’을 촉발한 우수인재의 의대 쏠림 현상도 다소 주춤해졌다. 주요 공대의 세계 대학평가 순위도 매년 상승 추세다.
이건우 서울대 공대 학장
박진우 고려대 공대 학장
손봉수 연세대 공대 학장 좌담회
논문이든 산학협력이든 획일적 대학평가는 문제
우수 인력 공급 등 산업계 기여도로 평가해야
공대 박사 중기 근무 병역특례로 산학협력 강화를
사회=안현실 논설위원
그러나 공대가 기업과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제대로 길러내고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붙는다는 지적이 많다. 연구비 수주와 직결된 논문 실적을 최고로 여기는 풍토 탓에 산학협력은 물론, 반도체 자동차 플랜트 철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주력산업의 교육과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다. 대학과 산업계 수요 간 ‘미스매치’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한국경제신문은 서울 중림동 본사 회의실에서 이건우 서울대 공대 학장, 박진우 고려대 공대 학장, 손봉수 연세대 공대 학장이 참석한 좌담회를 열어 공과대학이 산업현장에서 멀어진 이유를 짚어보고 바람직한 산학협력과 공대혁신 방안을 찾았다. 안현실 한경 논설위원이 사회를 봤다.
▷사회=반도체 자동차 등 한국의 주력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공대에서도 이들 분야에 대한 교육·연구가 점차 외면받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이건우 서울대 공대 학장=각종 국가연구사업과 대학평가 등이 논문 실적을 잣대로 이뤄지는 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대학에서 두뇌한국(BK) 사업을 따내려면 논문 편수가 많아야 유리하다. 국내외 기관이 하는 대학순위평가도 마찬가지다. 모든 대학이 논문이 잘 나오는 바이오·나노 등 첨단 분야에서 주로 신임교수를 뽑고, 기계·철강·석유화학 등 전통적인 분야는 등한시하게 됐다.
▷박진우 고려대 공대 학장=10여년 전부터 국가 연구개발(R&D) 정책 방향이 이미 성숙한 주력산업 또는 전통 분야 대신 미성숙한 첨단 분야에 집중 투자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다 보니 자동차를 포함한 기계와 전기전자 등은 국가 R&D에서 완전히 소외됐다. 기계공학과마저 연구비를 잘 타내는 바이오·나노 전공자를 교수로 뽑아 자동차·기계 등 전공 교수를 확충할 여력이 없어졌다.
▷손봉수 연세대 공대 학장=전통적인 분야를 전공한 교수들이 연구 과제를 거의 받지 못해 학교에서 소외되고 있다. 교수의 영향력이 줄어들면 학생들도 그 교수의 연구실을 기피하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해당 교수가 퇴직했을 때 소위 잘나가는 다른 분야로 교수를 채용해야 하는 것 아닌지 고민이 생긴다. 미래기술을 집중 육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력 양성의 측면에선 전통 분야 교육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 각종 국책연구사업의 평가지표를 분야별 특성에 맞도록 개선해 연구비 쏠림 현상을 바로잡아야 한다.▷사회=정부가 지난해 공대혁신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산학협력 지표를 강화하는 공대혁신안을 내놨는데 용두사미가 됐다는 지적이 있다.
▷이 학장=실제로 뭐가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산학협력 지표 반영으로 골치만 더 아파졌다는 얘기가 있다. 산학협력 실적을 증명하기 위해 언제 어느 기업체를 방문했는지 등 온갖 시시콜콜한 자료를 다 제출하라고 해 행정 부담만 늘었다.▷손 학장=모든 사업에 산학협력 실적을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건 잘못이다. 예컨대 정부의 선도연구센터(ERC) 사업은 철저한 연구 위주 프로젝트인데 평가지표에 무조건 산업체 경력 교수 비율을 넣겠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박 학장=대학도 문제다. 교수들이 어느새 논문 위주로 돌아가는 현 체제에 익숙해졌다. 요즘은 대학마다 교수가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 논문 한 편을 쓰면 편당 100만~200만원의 성과급을 준다. 바이오·나노 등 일부 첨단 분야 교수는 이걸로만 연간 5000만~6000만원씩 받아가기도 한다. 이런 인센티브 체계를 갑자기 바꾸자니 저항이 따르게 마련이다. 한 번 형성된 생태계는 바뀌기 어렵다.
▷사회=공대혁신을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박 학장=지금까지의 공대혁신안은 일종의 ‘대증요법’이었다. 배가 아프다고 하니 계속 소화제만 먹이는 꼴이었다. 과거엔 논문 많이 쓰라고 했다가 외국인 교수 많이 뽑으라고 하더니, 이제는 산학협력 실적으로 교수를 채용하고 평가하라고 한다. 논문이든 산학협력이든 정량지표로 평가하면 왜곡이 생기게 마련이다. 엄밀하고 공정한 정성평가, 예컨대 동료평가(피어리뷰) 비중을 높여야 한다. 독립적인 평가위원회를 구성해 힘을 실어줘야 한다. 공대의 본질적 역량을 평가하기 위해선 얼마나 우수한 인력을 사회에 공급하는지, 산업계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를 알아보면 된다. 그런데 ‘교수 1인당 건물면적’ 등은 왜 따지나. 이런 지표 때문에 낡아서 당장 재건축이 필요한 건물을 그냥 놔두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사회=교육부가 지난달 대학구조개혁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나.
▷이 학장=한국은 뭘 하든 획일적인 게 문제다. 이번에 D등급을 받은 일부 지방대는 애초 설립목적과 교육방향이 서울 주요 대학과 다른데 똑같은 잣대로 평가하겠다고 하면 그건 공정하지 않다. 전문대 교수조차 SCI 실적으로 평가하는 건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박 학장=고려대 세종캠퍼스는 서울 안암캠퍼스와 비슷한 학과가 있어 특성화가 덜 됐다는 이유 등으로 평가에서 D등급을 받았다. 그런데 융합이나 특성화를 정부가 강요하는 것도 문제다. 각 대학이 융합이란 이름으로 무수히 많은 학과를 개설하고 있는데 그럼 거기선 가장 기초가 되는 전통적인 과목들을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건지 의문이다.
▷사회=지방에 과학기술원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 학장=서울대는 KAIST가 생겨 자극을 많이 받았던 게 사실이다. GIST(광주과학기술원)까지도 괜찮았다. 그러나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와 UNIST(울산과학기술원)는 무슨 이유로 잇달아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아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산대 경북대 등 국립대는 방치하겠다는 얘기인지….
▷손 학장=이미 인프라가 구축된 지방 국립대를 놔두고 별도로 과기원을 신설하는 건 혈세 낭비다. 한번 정부 돈이 들어가기 시작한 학교는 나중에 없애기 쉽지 않다.
▷박 학장=당장 지방 과기원에 배정된 전문연구요원 선발인원이 크게 늘어 서울 주요 공대 학생이 역차별당하고 있다. 대학원생이 연구는 미룬 채 영어시험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등록금 부담이 거의 없는 과기원에 병역특례 혜택까지 몰아주는 건 악습이라고 본다. 왜 다른 대학에 다니는 젊은 학생들의 기회를 빼앗나.
▷사회=얼마 전 서울대에서 자기반성을 담은 ‘서울공대 백서’가 나왔다.
▷손 학장=서울대에서 펴낸 백서지만 그 앞에 ‘연세대’를 넣어도 똑같겠더라. 한국 공대가 직면한 문제가 잘 정리됐다고 생각한다. 각종 국책연구원의 이름을 넣어도 다르지 않을 것이란 얘기도 들었다.
▷사회=산학협력이 잘 안 된다는 얘기가 자꾸 나오는데.
▷손 학장=산학협력으로 중소기업을 돕고 싶지만 대부분 기업 재정이 열악해 대학원생 인건비도 지급하기 힘든 실정이다. 일부 매칭사업이 있긴 하지만 실제 잘 기능하는 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이 학장=중견·중소기업을 제대로 도와주려면 전국 공대에 많이 있는 박사과정생을 활용해야 한다. 요즘 대학에는 석사학위를 받고도 박사과정에 5년 넘게 머무르는 학생이 많다. 지방에 과기원이 많이 생기면서 전문연구요원 선발 경쟁률이 높아져 세 학기 동안 휴학하며 영어만 공부하는 학생도 있다. 그래서 전문연구요원과 별개로 박사과정 졸업 후 중견·중소기업에서 3년간 근무하는 조건의 병역특례제도를 마련하면 이런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를 줄이고 산학협력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한동안 우수인재가 의대로 몰리면서 ‘이공계 위기론’이 나왔는데 요즘은 공대가 취직이 잘돼 인기라고 한다.▷박 학장=‘위기’란 표현이 달갑지만은 않다. 정부에서 위기라고 하면서 대학을 옭아매는 새로운 규제나 정책을 내놓을까 두렵다. 적절한 재원을 확보해주고 온갖 규제를 풀어야 대학이 살아날 수 있다.
정리=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