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절대 가치'란 없다…시대의 필요에 따라 선택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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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의 탄생1982년 그리스 농촌 마을 아시로스의 고고학 발굴 현장을 찾은 한 영국 고고학도는 어느 날 저녁, 발굴단 숙소 앞을 지나가는 한 노인을 봤다. 노인은 당나귀에 걸터앉아 작대기로 당나귀 엉덩짝을 두들기며 갔고, 그 옆에는 그의 부인이 무거운 자루를 짊어지고 걸었다. “부인은 왜 당나귀를 타지 않느냐”고 묻자 노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내에겐 탈 당나귀가 없어요.”
이언 모리스 지음 / 이재경 옮김 / 반니 / 480쪽 / 2만2000원
모리스 교수의 가치관 결정론
수렵-농경-화석연료 시대 거치며 각 시대 보편적 가치관 달라져
폭력에 너그러웠던 수렵 사회, 농경민은 평등보다 위계 중시
화석연료 사회는 민주주의 요구
일부선 "지배층 이념에 가깝다" 다양한 반론도 함께 소개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문명사학자인 이언 모리스 미국 스탠퍼드대 역사학 교수가 쓴 《가치관의 탄생》은 저자가 30여년 전 겪은 ‘문화적 충격’을 풀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노인이 왜 그런 행동을 했고 저자는 왜 놀랐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2만여년에 걸친 인류 문명사를 문화적 진화의 시각에서 조망하며 가치관의 거시적 역사에 대한 야심 찬 주장을 펼친다.
저자의 이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인류사엔 크게 세 가지 인간 가치체계가 존재한다. 수렵채집 가치관과 농경 가치관, 화석연료 가치관이다. 세 가지 가치체계는 얼마간 겹쳐 존재했지만 연이어 발생했다. 각 가치체계는 특정 사회체제에 연동하고, 각 사회체제는 특정 에너지 획득 방식에 연동한다. 저자는 가치체계 비교 영역을 평등, 위계, 폭력에 대한 태도에 국한해 설명한다.
셋 중 가장 먼저 발생한 수렵채집 가치관은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주요 생산 수단으로 삼은 사회와 결부된다. 수렵채집인은 위계가 없지는 않지만 위계보다 평등을 중시하고, 폭력에 상당히 너그럽다. 농경 가치관은 주로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길러서 생활하는 사회와 연관된다. 농경민은 평등보다 위계를 중시하고, 폭력에 덜 관대하다. 화석연료 이용자는 아직 불평등하지만 위계보다 평등을 중시하고, 폭력을 용납하지 않는다.저자의 이론은 환원주의와 보편주의, 기능주의와 강력한 유물론과 진화론의 입장을 취한다. 빙하기가 끝난 뒤 인간의 환경에 일어난 최대 변화는 에너지 획득량의 폭발적 증가였다. 이 사건들은 흔히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으로 불린다. 인류사의 3대 가치체계가 3대 에너지 획득 방식과 대체로 겹치는 이유다. 2만여년 동안 인간의 에너지 추출량이 가파르게 상승했고, 이것이 문화적 진화를 추진했다. 그 과정의 일부로 인간 가치관이 변했다.
가치체계를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 끝에는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시대의 필요가 생각을 정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장기적으로 봤을 때, 무엇에 대해 옳아야 하는지의 선택들은 우리가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추출하는 방식에 크게 좌우된다. 에너지 획득 방식이 거기에 어떤 인구 구조와 사회체제가 가장 유용할지를 결정하고, 다시 이것이 어떤 종류의 가치관이 번성할지를 결정한다.
농경민이 위계를 선택한 것은 그들이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사회가 굴러가는 데 위계가 유리했기 때문이다. 화석연료 이용자들이 민주주의를 채택한 것은 그들이 성인군자여서가 아니라 에너지 폭발로 몰라보게 바뀐 세상에선 민주주의가 유용했기 때문이다. ‘아시로스 충격’은 가부장제의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는 노인의 가치관과 자유주의·개인주의로 대표되는 절정기 화석연료 사회의 대학원생 가치관의 충돌에서 빚어진 것이다.저자의 이론은 인간 가치관 연구에 크게 두 가지 함의를 던진다. 첫째는 절대보편의 완벽한 인간 가치체계를 주장하는 도덕철학 이론은 모두 시간 낭비란 뜻이다. 저자는 수렵채집 무리의 연장자부터 플라톤, 맹자를 거쳐 칸트와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통틀어 도덕철학자들이 한 일은 결국 본인이 속한 에너지 획득 단계에서 가장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또는 가장 유용했으면 하는 가치관을 개진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도덕철학자들은 다른 에너지 획득 단계에 대해서는 관심도, 인식도 없었다”고 말한다.
둘째는 우리가 오늘날 금과옥조로 받드는 가치관도 머지않은 미래에 골동품이나 폐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저자는 제4단계 ‘포스트-화석연료 가치관’에 대해 다양한 전망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논의를 마무리한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다양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겠다. 이 책의 특징이자 미덕은 고전학자 리처드 시퍼드, 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 철학자 크리스틴 코스가드, 문학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비판적인 논평들을 실었다는 점이다. 시퍼드는 역사의 진전에 대한 모리스의 견해가 “우리 시대 지배층의 이념과 가깝다”고 꼬집고, 코스가드는 “사회적·경제적 동인들이 가치관 형성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맞지만 가치관을 전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반박한다. 인류사와 인간 경험의 광대한 영역을 종횡무진 누비는 모리스의 거대한 통찰에 압도되지 않고 다양하고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그의 가치관 이론을 바라보게 해줄 만한 지점들을 제공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