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아너 코드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기게스의 반지’를 끼면 누구나 부도덕해지는 걸까. 자신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마법의 반지를 갖게 되자 이를 악용해 왕을 죽이고 권좌를 빼앗은 목동 기게스. 만약 이 반지를 도덕적인 사람과 부도덕한 사람에게 하나씩 끼워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플라톤은 《국가》에서 글라우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에서 열쇠수리공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사람 중 1%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습니다. 또 1%는 어떻게든 남의 것을 훔치려 들고요. 나머지 98%는 조건이 갖춰져 있는 동안에만 정직한 사람으로 남지요.” 이 98%가 도둑이 되는 것을 막는 장치가 곧 자물쇠라는 것이다.이들을 도덕적으로 남게 하는 방법으로 애리얼리는 ‘아너 코드(honor code, 명예서약)’를 꼽는다. 정직하게 행동하겠다고 밝히고 서명하는 것이다. ‘정직 선언’이나 자기암시만으로도 부정행위가 줄어든다는 것은 여러 실험으로 입증됐다. 대학 기숙사 냉장고 안에 콜라 6개들이 팩과 현금 6달러를 접시에 담아뒀더니 사흘 뒤에도 콜라만 사라지고 돈은 그대로 있었다.

상황에 따라 양심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학생들이 시험 시간에 커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정말로 커닝이 줄어든다. 하지만 윤리적 사고의 기준선이 없어지면 부정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부정은 전염되기도 한다. 그래서 ‘심리적 자물쇠’가 필요하다.

미국 대학들은 18세기부터 아너 코드를 적용했다. 밴더빌트대의 문구가 유명하다 “오늘 나는 두 가지 명예규율을 선언한다. 하나는 기하학이고, 다른 하나는 정직이다. (…) 당신이 둘 중 하나에 실패한다면, 그것이 기하학이기를 바란다. 멋진 사람 중 일부는 기하학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지만, 정직에 대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 중 좋은 사람은 없다.”우리나라에는 포항에 있는 기독교 계열의 한동대가 이를 적용하고 있다. 서울대도 올 1학기부터 도입한다. 시험 부정이나 논문 표절, 데이터 위·변조 등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시험도 감독 없이 치른다고 한다. 처벌의 두려움보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 부정의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돕자는 취지다. 늦었지만 잘한 일이다. 대학가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필요한 게 명예서약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