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여긴 범죄자 은신처 아냐…북한과 관계 재검토" 단교 시사

말레이 경찰 발표
"김정남 암살 독극물은 VX…화학전에서만 쓰이는 신경제"
여성 용의자 한명 중독 증세

중국의 대북 경고
CCTV, 평양 특파원 연결…'김정남 암살' 이례적 집중보도

< 北 성토하는 말레이 시민들 > 말레이시아 시민단체 관계자가 24일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북한 대사관 앞에서 북한에 보내는 항의 서한을 취재진에게 들어보이고 있다.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가 지난 20일 “말레이시아 경찰의 수사 결과를 믿을 수 없으며, 말레이시아 정부가 한국 정부와 결탁해 북한을 배후로 몰고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항의 표시다. 쿠알라룸푸르AP연합뉴스

말레이시아가 북한과의 단교를 시사했다. 아마드 자히드 하미디 말레이시아 부총리는 24일 “말레이시아는 범죄자들의 은신처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말레이시아는 김정남 피살 사건에서 전문성을 보였지만 북한의 주장은 이에 걸맞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북한의 안하무인 격 억지주장에 대해 말레이시아 내에서 북한과의 외교 관계 단절, 무비자협정 파기 등의 요구가 빗발치는 가운데 나온 발언이다.

김정남 암살 사건을 수사 중인 말레이시아 경찰은 김정남 독살에 신경작용제인 VX가 쓰였다고 이날 발표했다. VX는 화학무기로 분류되는 물질로 피부 접촉 시 독성이 사린보다 100배 이상 강하다.

경찰 보도자료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과학기술혁신부 화학국은 부검 샘플을 분석해 VX로 불리는 ‘에틸 S-2-디이소프로필아미노에틸 메틸포스포노티올레이트’가 김정남 시신의 눈과 얼굴에서 검출됐다고 잠정 결론 내렸다.

VX는 알려진 독가스 가운데 가장 유독한 신경작용제이며 호흡기, 섭취, 눈, 피부 등으로 인체에 흡수된다. 치사량은 피부 접촉 시 10㎎, 가스 흡입 시 30~50㎎이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VX가 국제협약인 화학무기협약(CWC)에 따라 화학무기로 분류되는 물질이라고 설명했다. VX는 유엔 결의 687호에 대량살상무기로 분류돼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VX를 화학전에서만 쓰이는 가장 강력한 신경제로 분류한다. 북한이 국제적으로 금지된 VX를 사용했다면 국제사회의 추가 제재를 불러올 수 있다.

기체 상태의 VX에 노출됐을 때는 몇 초 안에, 액체 상태로 노출됐을 때는 수분에서 최대 18시간 이내에 증상이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김정남 암살에 액체 VX가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할릿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이날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을 만나 VX로 김정남을 독살한 두 명의 여성 용의자 가운데 한 명도 자주 토하는 등 독극물 중독 증세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두 여성은 맨손에 독극물을 묻혀 김정남의 얼굴을 문질렀다. 용의자가 경미한 증상만을 보이는 만큼 해독제를 복용했을 것으로 점쳐진다.

김정남 암살 사건 보도를 자제하던 중국은 이날 관영 CCTV가 평양 주재 특파원을 연결해 사건을 보도하면서 사뭇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CCTV는 이날 아침 뉴스에서 말레이시아 경찰청장 브리핑, 평양 현지 보도, 한국 정부와 민간 반응 등 전날보다 두 배 많은 분량으로 김정남 사건을 10여분간 집중 보도했다. 중국이 김정남 암살과 관련해 북한에 경고를 보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