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요동치는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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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하나의 유럽’이란 구상은 뿌리가 깊다. 역사·문화적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 붕괴 이후 끝없는 분열과 전쟁으로 점철됐던 탓이다. 최초의 유럽 통합론은 1306년 프랑스 법률가 피에르 뒤부아가 교황의 권위를 중심으로 합치자고 주창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구교 간 30년전쟁과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독립 국가들의 각축과 할거가 이어졌다.(함규진, 《조약의 세계사》)
유럽 통합론이 재등장한 것은 산업혁명, 시민혁명으로 근대의식이 고양된 19세기다. 철학자 칸트가 말년에 ‘영구평화론’(1795년)으로 마중물 역할을 했다. 경제적 이해가 깊게 얽히면 항구적 평화가 올 것으로 봤다. 빅토르 위고는 1849년 파리 평화회의 개막연설에서 ‘유럽합중국’을 처음 언급했다. 역내 무(無)관세와 단일통화로 전쟁을 종식하자는 주장이었다.통합론이 구체화한 것은 참혹한 전화(戰禍)를 겪은 2차 세계대전 직후다. 영국 처칠 총리는 유럽합중국을 재주창했다.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망은 전쟁에 필수인 석탄 철강을 공동관리해 전쟁을 예방하자는 ‘슈망 플랜’을 제안했다. 정치 이해가 얽혀 난항을 빚자 후임인 장 모네가 선(先)경제 통합을 제안해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출범했다.
1957년 로마조약에 따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베네룩스3국 등 6개국이 참가한 ECSC는 유럽경제공동체(EEC)로 확대·발전했다. 오늘날 유럽연합(EU)의 기본원칙인 역내 무관세, 인력·자본·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 등의 모태가 로마조약이다. 통합 이후 유럽에선 전쟁이 멈춘 대신 그 호전적 성향을 축구로 발산해왔다.
로마조약이 60주년을 맞고도 별로 축하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지난달 25일 로마에서 EU 27개국 정상이 모였지만 EU와 ‘이혼 협상’ 중인 영국은 빠졌다. 주요국마다 반(反)이민, EU 탈퇴를 내건 극우정당들이 약진 중이다. 전초전인 네덜란드 총선(3월15일)에선 친(親)EU 정당이 승리해 일단 안도했지만 언제 제2, 제3의 브렉시트 선언이 나올지 전전긍긍이다. 뤼테 네덜란드 총리가 “네덜란드 총선이 8강전이라면 프랑스 대선(4월23일)은 준결승, 독일 총선(9월)은 결승전”이라고 했던 비유가 적절하다.EU에 대해 “20세기 가장 성공한 정치 프로젝트”(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라는 극찬이 있는 반면, “2023년까지 해체될 것”(바루파키스 전 그리스 재무장관)이란 독설도 있다. 미국 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2004년 ‘유러피언 드림’이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할 것으로 장담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요동치는 21세기 유럽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