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사랑은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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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27
침묵의 예술업무 관계자와 회의 자리. 상대방과 당신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당신은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아차!’ 하는 생각이 금세 든다. 괜한 말을 했다 싶어 자괴감에 빠진다. 소개받은 이성과의 첫 만남이나 동창 모임 등에서도 이런 일이 빈번하다.
알랭 코르뱅 지음 / 문신원 옮김 / 북라이프 / 224쪽 / 1만4000원
혼자 있을 때도 고요하면 불안하다. TV나 스마트폰을 켜 허공을 소리로 메우고 나서야 편안함을 느낀다. ‘소리 과잉’의 시대다. 현대인은 침묵을 공포로 받아들이는 듯하다.프랑스 역사학자 알랭 코르뱅은 《침묵의 예술》에서 그림에 여백이 필요하듯 청각에도 침묵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침묵을 배우다’가 부제인 이 책은 침묵의 가치를 깨닫고 침묵을 음미하는 법을 배우라고 권하고 있다. 알랭 코르뱅은 시간과 공간, 소리, 냄새 등 감각적 주제를 다루는 데 탁월하다고 평가받는 학자다.
저자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와 작가, 미술가, 종교인 등이 침묵에 대해 쓴 글들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침묵이 명상과 사색을 돕고 ‘나 자신이 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통로라고 역설한다.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로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여보자. “침묵에는 토양처럼 변화무쌍한 깊이와 비옥함이 있다. 침묵만이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사회적 관계에서도 침묵은 이점을 갖는다. 저자는 프랑스 화가 드라크로와의 말을 소개한다.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만 이길 수 있다.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당연히 많을 터다. 그러자면 상대방이 하려는 말은 분명 무시할테고. 바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듣는 그 헛된 기쁨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쉽게 이끌린다.”벨기에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디오니시우스 카르투시아누스의 말은 보다 직접적이다. “입을 다무는 데는 조금의 위험도 없지만 말을 하는 데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 저자는 “말하는 기술보다 침묵하는 기술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도 침묵은 빛을 발한다. 벨기에의 시인이자 극작가 마테를 링크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우리가 깊이 사랑했던 존재에 대해 기억하는 부분은 그 사람이 했던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그와 함께 겪었던 침묵이다. 우리의 사랑과 영혼의 특성을 밝혀준 건 오로지 그 침묵의 특성뿐이기 때문이다.”
풍부한 인용이 돋보인다. 옛 예술가들이 느낀 ‘침묵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한다. 하지만 침묵에 대한 자신만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해 아쉽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