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만 내리고 엄마 태운채 떠난 '황당 버스'

건대입구역서 발생…서울시, 조사착수

혼잡 상황서 아이 휩쓸려 하차
출발 10여초 후에 상황 인식
정차 안해 엄마는 다음역 내려

기사 "아이 내린 줄 몰랐다"
지난 11일 오후 6시30분께 서울 건대입구역 사거리 정류장. 퇴근길 승객이 빼곡히 들어찬 240번 간선버스가 멈춰섰다. 뒷문이 열리자 승객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일곱 살 A양도 인파에 휩쓸려 하차했다. A양의 어머니 B씨는 버스가 문을 닫고 출발한 뒤에서야 딸이 하차했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버스 기사에게 “내려달라”고 소리쳤다. 기사는 10초쯤 지나 실내 백미러를 통해 상황을 인지했다. 기사가 사후에 제출한 경위서에 따르면 당시 버스는 이미 편도 4차선 도로 중 2차선에 진입한 상태였다. 어린 딸을 홀로 남겨둘 수 없었던 B씨는 “버스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동승한 승객들도 이구동성으로 “버스를 세우라”고 외쳤다.

그러나 기사는 말없이 달렸다.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주정차를 하게 될 경우 6개월 이내 자격정지와 20만원 이하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 운전석으로 간 B씨는 울먹이다시피 애원했지만 기사는 결국 43초 뒤 다음 정류장인 건대입구역에서 B씨를 내려줬다. B씨는 곧바로 270m 떨어진 직전 정류장으로 냅다 뛰었다. 다행히 제자리에서 엄마를 기다린 A양을 품 안에 안을 수 있었다.서울시 관계자는 12일 “버스 내부에 설치된 폐쇄회로TV(CCTV)의 분석을 마쳤고 해당 버스업체와 기사 등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관계 법령을 살펴 기사에 대한 징계 등 후속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관계에 대한 논란도 있다. 버스회사 측 관계자는 “당시 버스기사는 어머니가 내리는 순간까지 아이 혼자 전 정류장에서 내린 줄 모르고 있었다”며 “단순히 이전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해 내려달라고 한 줄로만 알았다”고 해명했다. 해당 기사는 20여 년간 무사고 운전자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CCTV 영상을 공개하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여러 억측이 오가는 가운데 도덕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판단을 가리기 위해선 직접 증거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B씨 주장에 따르면 하차 요구를 한 시점은 버스가 정류장에서 출발하기 전이다. 이 음성을 기사가 인지한 것인지, 당시 버스가 얼마나 가 있던 상황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규칙 제42조 3항에 따르면 자동차 운행 중 중대한 고장을 발견하거나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될 때는 즉시 운행을 중지하고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는 조항도 있다. 전문가들은 해당 조항에 이번 사건이 적용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일각에서 유기죄 적용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법조계는 회의적인 반응이다. 배승열 법무법인 충정 변호사는 “유기죄가 성립하려면 탑승할 때 민법상의 계약이 성립하고, 운전기사에게 아이에 대한 신의성실 의무가 성립해야 한다”며 “버스기사의 고의성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기죄 가능성을 제기하는 건 억측”이라고 설명했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