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칼럼] 숫자 3에서 배워야 할 지혜

박기호 선임기자 겸 좋은일터연구소장 khpark@hankyung.com
삼부(三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삼족오(三足烏: 신화에 나오는 세 발 달린 까마귀) 정족(鼎足: 솥발이나 솥발처럼 대립하고 있는 형국)의 공통점은 숫자 3이다. 이들 단어에 담겨 있는 숫자 3에는 견제와 보완을 통해 균형을 취한다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노사정(勞使政)’도 경제를 이끌어 가는 주체들, 즉 노동자 사용자 정부를 아우른다는 점에서 숫자 3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노사정을 법·제도화한 것이 바로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다. 보통 노사정위원회로 불린다. 노사정위원회 출범 시기는 외환위기와 궤를 같이한다. 국가부도 위기 이후 거세게 밀려온 구조조정 파고를 3개 주체들이 슬기롭고 지혜롭게 넘어보자는 취지에서 김대중 정부가 만든 것이 노사정위원회다. 20년을 맞아 과거사로 치부되기도 하는 외환위기를 돌파하는 데 금 모으기 같은 국민적 노력과 노사정위원회라는 제도적 틀이 큰 동력이 됐음은 부인하기 힘들다.두드러지는 '사용자 패싱'

물론 노동계 일부에서는 노사정위원회가 구조조정의 칼날 노릇을 했다며 재가동 자체를 반대하고 있기는 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만찬 초청까지 뿌리치면서 말이다.

노사정의 3자 간 균형은 그 어느 때보다 치우치는 양상이다. 출범 후 줄곧 사측을 대표해온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서,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박근혜 정부 노동개혁의 적폐 세력으로 몰리면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전락하는 이른바 ‘패싱’을 당하고 있다. 노사 대화 창구의 전면에 섰던 경총은 기능과 역할을 빼앗겨 결국 조직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는 고사(枯死)설까지 나돌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사측 대변자로 전면 부상하고 있지만 전경련과 경총을 대신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노사정위원회에서 수행해온 역할이 미미한 데다 조직도 취약해서다. 대한상의에서 고용노동 분야를 전담하는 실무 인력은 고작 네 명이다.‘사용자 패싱’은 노사정위원회는 물론 노사정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각종 위원회로도 확산일로다.

개혁과 변화는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긴 하되 과거와의 단절 가능성이라는 리스크도 함께 갖는다. 경영 여건이 초스피드로 변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나타나는 단절을 복구하거나 새로운 제도로 메우려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를 치른다고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새로운 폐단 쌓아서야노사정은 숫자 3이 보여주듯 견제·보완·균형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지금 노사정에서 사를 찾기는 힘들다. 정보다는 청(청와대)이 도드라진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노동시장의 주요 국정과제인 비정규직 해소를 위해 문 대통령이 현장을 처음 찾은 인천공항공사가 노노갈등 내홍에 내몰린 것도 균형감 상실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노정청뿐인 ‘사용자 패싱’은 정립(鼎立)의 균형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경제전쟁 시대에 믿을 만한 전사(戰士)는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삼아 노사를 양 날개로 활개치는 기업들이다. 사용자 패싱은 필연적으로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새 정부가 속도를 내고 있는 노동시장 적폐청산이 노사정 간 균형 상실과 경쟁력 약화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새로운 폐단을 쌓아 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숫자 3은 지금 우리에게 ‘노사정 3개 주체 간의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지혜로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그 경계를 구분짓는 잣대는 지혜의 수용 여부다.

박기호 선임기자 겸 좋은일터연구소장 kh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