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아름다운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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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보다 더 잘사는 게 진정한 복수"낸시 애스터는 철옹성 같았던 20세기 초 영국 사회의 성(性)차별 장벽을 뛰어넘어 첫 여성 하원의원으로 당선(1919년)된 개척자다. 그에게는 두 가지 핸디캡이 더 있었다. 하나는 영국인들이 얕잡아 보던 ‘양키(미국인)’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26세 때 영국으로 이민을 간 ‘뜨내기’였다. 게다가 이혼녀였다. 이런 겹겹의 걸림돌을 넘어선 그는 “당신의 성공에 대한 대가는 당신을 무시해온 사람들이 치른다”는 말을 남겼다.
기업 약진과 한류 돌풍이 '극일(克日)의 길' 제시
더 많은 분야서 일본 앞설 '큰 그림' 그려야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
수천 년 전 조국을 잃고 타국으로 흩어져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도 비슷한 경구(警句)를 새기며 고난을 견뎠다. “잘살아라. 그것이 최고의 복수다”라는 탈무드 구절이다.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가장 큰 복수는 복수의 대상보다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했다.어처구니없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오로지 증오를 품고 저주하거나, 같은 방식으로 되갚는 것은 상책(上策)이 될 수 없다. 그런 명제(命題)를 새기게 해주는 어록도 적지 않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은 “개에게 물린 상처는 개를 죽인다고 아물지 않는다”고 했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분노는 그것을 부은 곳보다도, 담고 있는 그릇을 더 많이 훼손시키는 산(酸)과 같다”고 설파했다.
그런데 실컷 당하고 나서도 수치심이나 모멸감을 새기기는커녕 자신의 무기력함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한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근대 중국 작가 루쉰의 소설 주인공 아Q가 그런 전형적 인물이다. 20세기 초반,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등 열강들에 영토를 뜯어 먹히면서도 무기력을 떨쳐내지 못하던 당시의 중국 사회를 풍자한 작품이었다.
1592년 일본으로부터 침략(임진왜란)을 당해 국토와 백성들을 유린당한 조선의 이후 역사가 아Q를 연상시킨다는 지적이 있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치욕으로만 여겼을 뿐, 그것을 되갚아주려는 장기적이고 치밀한 준비가 없었다. 뒷골목에서 천하게 회자되는 그런 수준의 복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복수는 극복이고 자기 회복의 필수적인 과정이다.”(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탁월한 사유의 시선) 조선은 300여 년 뒤 더 큰 치욕을 당했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가 됐다. 이 땅의 수많은 아녀자들이 일본 군인들의 위안부로 능욕을 당하고, 남자들이 총알받이 병사와 탄광 광부로 끌려간 것은 그들을 지켜줄 나라가 없었던 탓이었다.일본도 외세에 굴욕을 당한 역사가 있다. 1854년 미국 해군 페리 제독이 이끈 선단의 공격을 받고 항복한 ‘구로후네(黑船) 사건’이 그것이다. 조선과 달랐던 것은 이 치욕을 자강(自强)의 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봉건제라는 낡은 제도를 벗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해 서구열강의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계기로 활용했다. 그 결과는 짧은 기간 내에 이들 국가와 맞먹는 강국으로 환골탈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일본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난 지 60년이 훨씬 넘도록 위안부 문제에 온전한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참담하다. 그런 참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4일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전격 발표하면서 “한국 정부에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요구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북핵 공동대응 등 시급한 외교안보 현안마저 뒷전에 미뤄놓는 블랙홀로 더 부각되고 있다.
과거사 문제에는 양국 각각의 국내 정치문제까지 얽혀 있다. 빠른 진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때 떠오르는 게 ‘진정한 복수’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과 달리, 일본 식민잔재를 딛고 건국한 대한민국은 적지 않은 분야에서 일본과 어깨를 겨루거나 앞서 나가는 성취를 일궈냈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을 압도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제품들이 그렇고, 일본 한복판을 휘젓고 있는 음식 K팝 화장품 등 한류(韓流) 문화상품들이 그렇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진정한 극일(克日)의 길을 확인시켜준다. 우리 사회의 더 많은 분야에서 일본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역량을 쌓는 일이 절실하다. 정부가 앞장서 해내야 할 중요한 숙제일 것이다. ‘적폐청산’을 뛰어넘는 큰 그림이 필요하다.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