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조선사 몰락에 해운 적자도 사상 최대… 흔들리는 '해양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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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 구조조정지난해 11월 세계 최대 철광석 회사인 브라질 발레는 총 40척 규모의 초대형 운송계약을 발주했다. 폴라리스쉬핑 대한해운 H라인 등 국내 해운회사는 27척, 중국 해운사는 13척의 일감을 따냈다. 하지만 국내 조선업체는 큰 수혜를 보지 못했다. 현대중공업만 19척의 일감을 따냈을 뿐 나머지 국내 해운사가 확보한 8척을 모두 중국 조선소에 뺏겼기 때문이다. 중국 선사가 모두 중국 조선소에 발주한 반면 국내 팬오션과 SK해운 등은 6척을 중국 조선소에 발주했다.◆사라져가는 낙수효과8일 정부와 채권단이 법정관리와 고강도 구조조정을 각각 발표한 성동조선해양과 STX조선은 국내 4, 5위 조선사로 한국 조선산업의 허리 역할을 해온 기업이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이른바 ‘빅3’의 실적 회복세가 가시화되지 않는 상황인 만큼 조선산업 생태계 자체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조선·해운 동반 부실
국내 해운업계 발주 많은
중소형 유조선·벌크선 등 중견사 사라지며 중국에 뺏겨
선박 수출도 급감
2011년 566억달러 정점 찍고 지난해 416억달러로 추락
해운 경쟁력도 급속 약화
한진해운 파산 2년 만에 해운업계 매출 10조 증발
이미 2013년에 21세기조선과 삼호조선, 2015년 신아SB(옛 SLS조선), 2016년 SPP조선 등이 잇따라 파산하거나 폐업했다. 중형 조선사가 잇따라 문을 닫으면서 ‘조선·해운 간 선순환 구조’도 무너졌다. 지난해 중국 해운회사의 자국 조선소 발주 비중은 80%가 넘고 일본도 60% 이상에 달했지만 한국은 40%에도 미치지 못했다.
선박 수주와 건조가 조선 기자재업체에 대한 주문 확대로 이어지는 ‘낙수효과’도 크게 줄어들었다는 분석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중형 조선사가 주로 건조해온 벌크선, 유조선 등의 범용선박은 국내 기자재 조달 비중이 90%가 넘는다. 하지만 국내 대형 조선사가 강점을 지닌 LNG선 등은 국내 기자재 조달 비중이 65%, 해양플랜트는 20%에 불과하다. 고부가가치선일수록 외국산 기자재가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유병세 조선해양플랜트협회 전무는 “중소형 조선사의 몰락은 수많은 기자재업체와 2, 3차 협력업체의 동반 추락으로 이어져 조선산업 생태계 자체를 괴멸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약해지는 해양강국의 위상
‘달러박스’로서의 조선업 위상도 현저히 약화됐다. 2011년 565억9000만달러로 반도체 자동차 등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한 선박 수출은 2016년 342억7000만달러로 급감했고, 2017년 415억8000만달러에 그쳤다. 수출을 주도하고 있는 ‘반도체 슈퍼호황’이 수그러들어도 그 공백을 메울 것으로 기대하기가 어려운 여건이다.
무엇보다 빅3 자체가 생존을 걱정할 정도로 조선업을 둘러싼 주변 여건이 좋지 않다. 2015~2016년 ‘수주 절벽’ 여파로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은 올해 적자를 예고하고 있다. 여기에 정부가 빅3를 빅2로 줄이는 구조조정을 미룬 상황에서 국내 업체 간 출혈경쟁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선박을 발주하는 글로벌 선사들도 한국과 중국 등의 경쟁을 즐기며 좀처럼 가격을 올려주지 않고 있다. 영국 조사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가격은 3월 현재 척당 8500만달러로 역사적 고점인 2008년 9월(1억6200만달러)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이 같은 상황에서 국내 해운산업 기반이 급속히 무너지는 것도 조선업의 동반 부실을 부채질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해상운송수지(수입액-지급액) 적자는 47억8010만달러로, 2006년 관련 통계가 나온 뒤 최대폭의 적자를 기록했다. 국내 1위 컨테이너선사였던 한진해운이 2016년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파산한 데다 2위 현대상선까지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영업력이 크게 위축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해운업계 매출은 20조원을 밑돈 것으로 추산된다. 2015년 대비 10조원 이상 감소했다.
국내 해운업계의 미주노선 점유율도 2016년 6월 10.9%에서 작년 6월 5.8%로 반토막 났다. 한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조선과 해운은 한국 제조업이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는 데 강력한 디딤돌을 놔준 해양산업”이라며 “정부는 지금이라도 조선과 해운의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