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FROM 100] "산업화 시대 규제 마인드로는 4차 산업혁명 주도권 잡기 어려워"

국민소득 3만弗 시대 과제

AI·자율차·빅데이터 등 장기적 투자 필요한데
눈앞의 실적에만 치중… 과감한 모험투자 꺼려

자금지원보다 더 중요한 건
기업 손발묶는 규제 푸는 것

정부 정책 여전히 경직
기능·역할 완전 재정립을
민간 싱크탱크 FROM 100과 한국경제신문사는 지난 10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의 정책 과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왼쪽부터 박가열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위원, 백기승 성균관대 성균오픈소스SW센터 교수(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 김범수 연세대 정보대학원 교수(바른ICT연구소장), 이인실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정진화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 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FROM 100 대표),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 정회훈 DFJ아테나 대표, 박진배 연세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이준기 연세대 정보대학원 교수, 이광철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물건을 생산해 많이 파는 게 선(善)이었던 산업화 시대의 ‘수출 마인드’로 4차 산업혁명에 접근해선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죠.”(이준기 연세대 정보대학원 교수) “돈을 푸는 것보다 중요한 건 기업의 손발을 묶고 있는 규제부터 푸는 것입니다.”(이인실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정부가 혁신 성장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내세우며 4차 산업혁명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지만 경직된 기존 정책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민간 싱크탱크 ‘FROM 100’과 한국경제신문사가 지난 10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연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의 정책 과제’ 토론회에서다. 전문가들은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창업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하드웨어식 접근은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생태계를 조성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입을 모았다.원천기술 못 키우는 투자 환경

정부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4차 산업혁명 띄우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인공지능(AI)·빅데이터·사물인터넷(IoT)·자율주행자동차·블록체인 등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이 미래의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란 판단에서다.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달랐다. 정부 기관들이 기업에 필요한 지원을 적시에 제공하기보다 수천만원 단위로 지원액을 쪼개 실적을 부풀리는 데 치중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한국의 신생 벤처들은 숙박·배달 등 서비스업에만 치중돼 있다”며 “의료나 자율주행차 등 원천기술을 갖춘 스타트업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임 센터장은 “원천기술을 갖춘 스타트업이 성장하려면 대규모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중장기 실적을 기다려주는 풍토가 조성돼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정부의 기능과 역할 재정립해야”

정부의 기능과 역할을 완전히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다. 미국 벤처캐피털인 DFJ아테나의 정회훈 대표는 “국내 모험자본은 고위험·고수익보다 저위험·저수익을 선호한다”며 “국민연금 군인공제회 등 정부 자금이 포함됐을 땐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고 말했다.벤처캐피털 시장에서 최대 화두로 떠오른 가상화폐공개(ICO) 관련 스타트업 투자를 예로 들었다. 정 대표는 “성장이 유력한 ICO 관련 국내 스타트업 투자를 앞두고 정부의 자금 집행 담당자들이 난색을 보이더라”며 “결국 해외 자금이 투자를 도맡게 됐다”고 했다. 위험이 따르는 투자를 꺼리는 실무자들의 보신주의가 영향을 끼쳤다는 설명이다.

과감한 모험투자를 활성화하려면 정부의 평가 및 지원 체계를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는 과감한 주문도 있었다. 임 센터장은 “지원 실적이 얼마나 됐는지보다 중장기적으로 기업을 얼마나 잘 발굴해 키웠는지를 보고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고 했다. 스타트업이 성장해 재투자에 나서면 양질의 고용 창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얘기다. 이준기 교수는 “정부는 기본적으로 논란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산업과 투자는 통제해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며 “아예 민간위원회에 자율성과 책임을 주고 온전히 맡기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규제가 가로막는 일자리 창출정부가 추진 중인 ‘규제 샌드박스’에도 의구심이 쏟아졌다. 규제 샌드박스는 다양한 신기술을 실험할 수 있도록 일정 기간 기존 규제를 면제 또는 유예해주는 제도다. 소비자 피해가 발생하면 무조건 기업이 책임지도록 하는 법 조항이 추가되면서 혁신적인 시도를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백기승 성균관대 성균오픈소스SW센터 교수는 “한국에선 정부 정책이 신산업을 왜곡하거나 방치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고 했다. 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FROM 100 대표)도 “각종 규제가 결국에는 사라질 일자리를 보호하고,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막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 FROM 100은

FROM 100은 한국 대표 지식인 100여 명이 참여하는 민간 싱크탱크다. 미래(future) 위험(risk) 기회(opportunity) 행동(movement)의 머리글자에 숫자 100을 붙인 것이다.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FROM 100 대표) 주도로 2016년 10월 출범했다. 연구력이 왕성한 중견 학자와 신(新)산업 분야 젊은 지식인이 주축이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