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주물공장의 추억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기자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 영등포엔 공장이 많았다. 제과 제빵 방적 업체들이다. 주물공장도 여럿 있었다. 당시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은 동네 어린이의 우상이었다. 이들은 월급날이 되면 두툼한 월급봉투를 가슴에 품고 보무도 당당하게 퇴근했다.

이날만큼은 공장 정문 근처 술집도 잔칫날이었다. 밀린 외상값을 갚은 뒤 막걸리 파티를 벌였다. 주물공장은 동네 주민 수백 명을 먹여살리는 원천이었다. 종사자들은 수출품을 제조해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자부심도 있었다.이들 공장은 재개발에 밀려 1980년대 인천 등지로 옮겨갔지만 2000년대 초반까진 성수기를 누렸다. 경제 성장과 더불어 주문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주물은 기계 자동차 선박 가전제품은 물론 대포 탱크 장갑차 등 방위산업 제품을 제조하는 필수 공정이다.

경기침체에 '화관법 태풍'까지

하지만 요즘 전국의 주물공장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경영자들은 어깨를 펴지 못한다. 평생 뜨거운 노(爐) 옆에서 일생을 바쳤고 수출품 제조를 위해 애써왔지만 이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사업 여건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를 동원해 가까스로 공장을 꾸려가는 가운데 ‘경기침체’와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더블 펀치가 날아들었다. 매출이 줄고 원가는 상승해 전체 주물업체의 80% 이상이 적자를 보고 있다는 게 서병문 주물조합 이사장의 분석이다.이번엔 핵주먹이 날아들었다. 화학물질관리법, 이른바 ‘화관법’이다. 유해화학물질을 엄격히 관리하는 법이다. 이 법의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안전한 곳에서 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정도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게 주물업체 사장들의 항변이다.

논란의 핵심은 화관법 규제 대상인 유해화학물질의 영업허가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는 데 있다. 첫 관문인 장외영향평가서를 작성하는 게 너무 어려워 컨설팅 업체에 2000만원을 줬다는 곳도 있다. 평가서 분량이 무려 책 한 권에 이른다. 취급시설검사를 받으려면 비파괴검사 내진설계검사 등 갖가지 검사를 거쳐야 한다. 전문기술인력을 채용해야 하는 업체는 이런 고급인력을 어떻게 구할지 걱정이다. 이 같은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문을 닫거나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다음달부터 단속이 본격화된다. 주물뿐 아니라 도금 열처리 등 수많은 뿌리기업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겁을 먹고 미리 폐업하는 업체도 있다.

사고 때문에 차 없앨 순 없어자동차 사고가 났다고 하루아침에 자동차를 전부 없앨 순 없다. 환경문제가 중요해도 그것 때문에 수천 개 업체가 문을 닫는다면 자동차 기계 전자 선박의 부품은 누가 생산할 것인가.

독일이 제조업 강국인 것은 소재산업인 철강과 주물 열처리 도금 등 뿌리기술이 든든한 밑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뿌리기술을 단순한 ‘기반기술’이 아니라 ‘첨단기술’로 보고 연구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뿌리기술이 마지막으로 남은 ‘선진국의 기술 프리미엄’ 영역이기 때문이다.

반면 국내 뿌리산업은 고사 위기에 놓여 있다. 뿌리기업인들은 자부심은커녕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언젠가 이들이 줄지어 문닫고 나면 자동차 전자 조선 방산업체들은 주물 제품 구입과 도금을 위해 동남아시아를 전전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당당했던 주물인들의 모습은 흑백사진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일까.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