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없는 생활, 고기 없는 한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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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재단 '그린보트' 타고 일주일
플라스틱 생수병, 테이크 아웃 컵과 빨대, 비닐봉지…. 일상생활은 물론 여행지에서라면 하루에도 몇 개씩 쓰고 버리는 게 당연했다. 일회용품이 없어서 조금 불편하지만, 지구에 보탬이 되는 '즐거운 불편'을 누리기 위해 특별한 항해에 나서는 그린보트에 올랐다. 우울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영국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2019년 올해의 단어는 'climate emergency', 즉 '기후 비상사태'였다. 이는 '기후 변화를 줄이고, 이로 인해 잠재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환경 피해를 피하기 위해 시급한 대응이 필요한 상황'으로 정의됐다.
우울한 이야기는 또 있다.
위기 상황이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넘었다는 과학자들의 우려다. 오하이오 주립대학 연구팀은 기후 변화로 인한 그린란드의 빙하 유실이 2003년 이후 4배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세계 153개국 과학자 1만1천명은 국제 과학 학술지에 낸 공동 성명을 통해 비상사태로 치달은 기후 변화를 멈추기 위해 인류가 긴급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파멸적인 재앙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이 제안한 기후 위기를 완화하는 방법 중 정부나 국제기구가 아닌 개인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육식을 채식으로 대체해 나가는 일이었다. 고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가 자동차나 비행기 등 이동 수단에서 나오는 것보다 많기 때문이다. ◇ 돈가스 마니아가 돼지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다큐멘터리 '잡식 가족의 딜레마'(2015)를 만든 황윤 감독은 자신도 한때 '돈가스 마니아'였다고 했다.
이른 폭염이 찾아왔던 2000년대 초의 어느 식목일, 동물원에서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는 북극곰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고, 로드킬로 죽어가는 야생동물이 안타까웠던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살아있는 돼지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0년 겨울 한반도를 덮친 구제역이었다.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가 생매장되는 광경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장 흔하게 먹는 돼지가 식탁에 오르기 전까지 어떻게 사육되는지, 잔인한 공장식 축산의 현장을 본 황 감독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돼지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악취 속에 한 마리씩 갇혀 철창을 물어뜯는 이상 행동을 하고 있었다.
황 감독의 카메라에 담긴 돼지 눈동자에 가득한 슬픔이 화면 밖으로도 전해졌는지, 객석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료는 화석 에너지를 써 가며 배로, 비행기로 실어오고, 동물의 분뇨는 처치 곤란한 심각한 쓰레기가 되는 악순환도 큰 문제였다.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이후 책 '사랑할까, 먹을까'(2018)로 펴냈고, 문재인 대통령이 설 연휴에 읽고 공장식 축산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 유별나지 않은 채식
채식은 유별나거나 까다로운 식습관이 아니다.
산업이 이렇게까지 발달하기 전, 상추, 풋고추 등 푸성귀와 된장, 고추장으로 차려지는 농촌의 밥상이 그대로 훌륭한 채식 식단이었다.
황윤 감독은 텃밭에서 거둔 작물들로 만든 음식이 얼마나 맛있고 몸에 좋은지 끝도 없이 '간증'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육식과 인스턴트 소비가 건강 문제로 되돌아오면서 다시 예전의 식생활, 건강한 채식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은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채식이 기본이어서 따로 요청해야 육식을 할 수 있고, 프랑스는 채식 급식을 의무화했으며, 캐나다의 권장식도 채식이다.
미국에서도 진보적인 주에 속하는 뉴욕이나 캘리포니아가 채식 중심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편의점에서 채식 도시락을 내놓을 정도다. 청와대 신년회에 초대받았던 황윤 감독은 "조심스럽게 요청했는데 채식 떡국을 마련해 주셨다"며 공공 급식이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족한 시간을 아쉬워하며 이야기를 풀어 놓은 황 감독의 열정과 노력은 참가자들에게도 가 닿은 듯했다.
강의가 끝나고 앞자리에 앉았던 두 중년 여성이 "그래, 고기는 좀 줄여야 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크루즈의 메인 식당 두 곳 중 한 곳이 채식 메뉴로만 차려진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식당은 붐볐다.
원래 채식을 하지 않지만, 영화를 보거나 강의를 듣고 일부러 찾은 사람들도 많았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은 기본, 버섯 튀김이나 가지 튀김, 감자 크로켓 등 채소 요리는 고기가 없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았다.
두부와 각종 나물, 김치로 푸짐하면서도 속 편한 한 끼였다. ◇ 플라스틱 없는 생활은 가능할까
환경 사진가 크리스 조던의 다큐멘터리 '알바트로스'에는 어미 새가 먹이인 줄 알고 플라스틱을 새끼에게 먹이거나 죽은 새의 배 속에 플라스틱 조각이 가득한 충격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인도나 동남아 지역의 바다와 강은 플라스틱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
고래 배 속에서 수십 ㎏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나왔다는 것은 이제 흔한 뉴스가 됐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홍수열 자원순환경제연구소 소장은 코끼리 상아 같은 사치품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탄생한 플라스틱의 역사를 훑었다.
군수용으로 사용되던 플라스틱은 세계대전 이후 대중 소비 시대가 열리자 폭발적으로 사용이 늘었다.
"플라스틱의 미래는 쓰레기통에 있다"고 생각한 산업계의 기획과 마케팅의 산물로 일회용품의 대표 주자가 된 것이다.
굳이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플라스틱의 분자 구조까지 설명한 것도 금세 납득이 됐다.
열을 가하면 녹는 열가소성 플라스틱은 재활용이 가능하지만, 열경화성 플라스틱은 한번 굳어지면 다시 녹지 않고 타서 가루가 되거나 기체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열경화성인 멜라민 수지 그릇은 재활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플라스틱 그릇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산성이나 기름기, 열을 만나면 플라스틱의 고분자 구조가 흩어져 환경 호르몬이 유출되기 때문이다.
생수를 담는 페트병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졌지만, 걸프전에 참전했던 미군이 사막에 둔 페트병에서 환경 호르몬이 검출되면서 안전한 플라스틱은 없다는 경각심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육지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플라스틱 쓰레기 중 가장 많은 것은 우수관에 버린 담배꽁초(담배 필터는 종이가 아니다)이고, 변기에 버리는 물티슈나 세탁수에 섞인 섬유 조각도 모두 미세 플라스틱이 된다.
바다에 떠다니는 것은 다 먹이인 줄 아는 해양 생물들이 섭취한 플라스틱은 그 생물을 죽이거나, 부서지고 부서져 미세 플라스틱이 되면 먹이사슬을 따라 우리 식탁으로 돌아온다.
1년 동안 신용카드 1장 정도의 미세 플라스틱이 인간의 몸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현재로선 측정이 불가능한 나노 단위의 미세 플라스틱이 정확히 얼마나 축적되는지,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조차 없다고 홍 소장은 경고했다.
실생활과 연결되는 이야기가 나오자 질문도 빗발쳤다.
주로 살림을 맡아 하는 주부는 물론, 어린 학생들까지 번쩍번쩍 손을 들고 어떻게 하면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물었다. ◇ 충격에서 시작된 변화…실천하는 사람들
몇 장의 사진과 짧은 강의로 받은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린보트 안에서의 시작은 간단하고 쉬웠다.
바로 강의를 듣는 사람들 앞에 놓인 개인용 텀블러였다.
플라스틱 생수병이 아닌 개인용 텀블러는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준비물 중 하나로 미리 공지됐다.
배 안을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텀블러를 들고 다녔다.
미처 챙겨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텀블러와 여행에 필요한 다회용품을 빌려주는 '그린 대여소'가 마련됐다.
너도나도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다 보니, 아주 가끔 종이컵이나 플라스틱 생수병이 보이면 "엥?"하고 되돌아보게 될 정도였다.
기항지인 대만에서 야시장 관광에 나설 때도 텀블러와 다회용기를 에코백에 챙겨간 사람들은 자신의 텀블러에 밀크티를 받아 마시고, 다회용기에 음식을 담아 먹었다. 일회용품 없는 카페 보틀 팩토리를 운영하는 정다운 대표와 쓰레기 없는 여행을 실천하는 와이어 아티스트 좋아은경이 좀 더 구체적인 실천적 대안을 보여줬다.
패키지 디자인을 하던 정다운 대표는 어느 날 사무실에서 쓰레기통이 모자라 주변까지 쌓여있는 테이크 아웃 커피잔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쓰레기 수거 차를 따라가서 확인한 것은 이 일회용 잔들이 재활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정 대표는 "일단 없는 게 원칙이고, 그다음에 방법을 찾았다"고 했다.
테이크 아웃을 위해 컵이나 텀블러를 제작하지는 않았다.
SNS에 취지를 설명하고 안 쓰는 텀블러를 기부해 달라는 글을 올렸더니 전국에서 600개가 모였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이곳저곳에서 받은 텀블러와 예쁘다고 산 텀블러가 대여섯개는 넘었다.
그렇게 기부받은 텀블러를 대여해주고, 플라스틱병에 담긴 탄산수 대신 탄산수 제조기를 마련했다.
종이 영수증은 요청하는 사람에게만 발행해 주고, 커피 원두도 배송을 받는 대신 가까운 로스터리에 그릇을 가져가 직접 받아오고 있다.
일상에서도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은 이어졌다.
장을 볼 때는 당연히 천 주머니를 이용하고, 반찬을 살 때도 비닐 포장된 제품을 집는 대신, 가져간 그릇에 담아달라고 요청한다.
정 대표는 사 온 음식을 그릇에 옮겨 담고, 플라스틱을 씻어서 분리 배출할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불편하지만은 않다고 했다.
그는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일회용품을 의식하고 거절하기'로 플라스틱 없는 생활을 시작해 보라고 제안했다.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작은 백팩 하나로 여행한다는 와이어 아티스트 좋아은경은 태국을 여행하면서 뜨거운 음식까지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실제 그가 여행 때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을 직접 보여줬다.
크고 잘 마르는 손수건 세 장은 때때로 빵을 담는 보자기 역할도 한다.
깊이가 있는 보관 용기 안에 어릴 적 쓰던 젓가락과 숟가락이 들어 있다.
어린이용 젓가락은 과일이나 음식을 찍어 먹는 꼬치로도 사용하고, 작은 숟가락은 아이스크림은 물론 음식도 충분히 먹을 수 있다.
텀블러는 생수용과 음료용 두 가지다.
이것들은 장바구니 하나에 쏙 들어간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팁은 '제 그릇(컵)이 있어요', '빨대(봉투)는 필요 없어요' 같은 말을 현지어로 익히는 것이다.
태국어로 이렇게 말했을 때 상인들은 모두 웃는 얼굴로 응대해준다고 한다. ◇ 무거워진 머리와 마음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
아직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흔치는 않은 크루즈 여행인데 학구열만 불태우다 갈 수는 없는 일. 무거워진 머리도 마음도 가볍게 비워줄 문화 공연들도 이어졌다.
소설가 은희경·정유정, 시인 오은이 함께 한 낭독회, 날마다 메일로 글을 보내주는 '일간 이슬아' 프로젝트로 주목받은 이슬아 작가의 북 콘서트, 그린보트의 터줏대감인 가수 이한철의 공연으로 밤의 보트는 따뜻하고 또 뜨거웠다. 참가그룹별로 진행되는 댄스 수업과 크루즈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라이브 공연, 댄스쇼, 노래방, 마술쇼도 열기를 더했다.
비싸고 느린 선내 와이파이를 연결하지 않으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대신, 밀렸던 책 몇 권을 탐독했다.
배 위에서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크루즈에서 배를 호텔로 삼고 기항지를 둘러보는 여행도 빼놓을 수 없다.
부산에서 출발한 그린보트는 44시간 만에 대만 북부의 항구 도시 지룽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가까운 수도 타이베이를 둘러보고 태평양에 면한 중부의 작은 도시 화롄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기상 상황이 악화하는 바람에 바로 제주로 향했다.
그린보트를 타고 왔으니 기왕이면 아끼고 지켜야 할 자연이 있는 곳을 찾아 무거워진 마음을 덜어냈다. 여섯번째 보트에 탄 은희경 작가 역시 평소에 찾아 듣기 쉽지 않은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동료 작가들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승객들을 만나는 일을 즐긴다고 했다.
특히 일본의 비정부기구(NGO) 피스보트와 함께 진행하는 '피스&그린보트' 때 맥주 자판기 옆에서 한국 사람만 보면 맥주를 빼주던 일본인이 기억에 남았고, 그때 들은 재일 한국인의 이야기는 언젠가 소설로 쓸 생각이라고도 했다.
이번에는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들에게 특별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그리고 은 작가의 대표작인 '새의 선물'까지.
"타인의 시각으로 나를 재단하거나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고민 끝에 고른 네 편의 소설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함께 읽고 나누는 시간이었다. ◇ 이토록 특별한 크루즈
크루즈는 '바다 위의 리조트 호텔'로 불리는 유람선 안에서 먹고, 자고, 즐기며 중간중간 들르는 기항지를 둘러보는 장기 여행이다.
한때 '호화 여행'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이유다.
환경을 주제로 한 테마 크루즈 '그린보트'는 환경 전문가를 포함한 각계 명사로 꾸린 게스트와 한배를 타고 주변국을 돌며 지구를 생각하는 환경재단의 프로그램이다.
환경재단은 2005년부터 일본 시민단체 피스보트와 함께 '피스&그린보트'를 14년째 이어왔으며, 2018년부터 '그린보트'를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다.
2020년 진행될 15회 그린보트 일정은 1월 중 그린보트 홈페이지(www.greenboat.kr)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
플라스틱 생수병, 테이크 아웃 컵과 빨대, 비닐봉지…. 일상생활은 물론 여행지에서라면 하루에도 몇 개씩 쓰고 버리는 게 당연했다. 일회용품이 없어서 조금 불편하지만, 지구에 보탬이 되는 '즐거운 불편'을 누리기 위해 특별한 항해에 나서는 그린보트에 올랐다. 우울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영국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2019년 올해의 단어는 'climate emergency', 즉 '기후 비상사태'였다. 이는 '기후 변화를 줄이고, 이로 인해 잠재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환경 피해를 피하기 위해 시급한 대응이 필요한 상황'으로 정의됐다.
우울한 이야기는 또 있다.
위기 상황이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넘었다는 과학자들의 우려다. 오하이오 주립대학 연구팀은 기후 변화로 인한 그린란드의 빙하 유실이 2003년 이후 4배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세계 153개국 과학자 1만1천명은 국제 과학 학술지에 낸 공동 성명을 통해 비상사태로 치달은 기후 변화를 멈추기 위해 인류가 긴급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파멸적인 재앙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이 제안한 기후 위기를 완화하는 방법 중 정부나 국제기구가 아닌 개인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육식을 채식으로 대체해 나가는 일이었다. 고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가 자동차나 비행기 등 이동 수단에서 나오는 것보다 많기 때문이다. ◇ 돈가스 마니아가 돼지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다큐멘터리 '잡식 가족의 딜레마'(2015)를 만든 황윤 감독은 자신도 한때 '돈가스 마니아'였다고 했다.
이른 폭염이 찾아왔던 2000년대 초의 어느 식목일, 동물원에서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는 북극곰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고, 로드킬로 죽어가는 야생동물이 안타까웠던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살아있는 돼지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0년 겨울 한반도를 덮친 구제역이었다.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가 생매장되는 광경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장 흔하게 먹는 돼지가 식탁에 오르기 전까지 어떻게 사육되는지, 잔인한 공장식 축산의 현장을 본 황 감독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돼지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악취 속에 한 마리씩 갇혀 철창을 물어뜯는 이상 행동을 하고 있었다.
황 감독의 카메라에 담긴 돼지 눈동자에 가득한 슬픔이 화면 밖으로도 전해졌는지, 객석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료는 화석 에너지를 써 가며 배로, 비행기로 실어오고, 동물의 분뇨는 처치 곤란한 심각한 쓰레기가 되는 악순환도 큰 문제였다.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이후 책 '사랑할까, 먹을까'(2018)로 펴냈고, 문재인 대통령이 설 연휴에 읽고 공장식 축산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 유별나지 않은 채식
채식은 유별나거나 까다로운 식습관이 아니다.
산업이 이렇게까지 발달하기 전, 상추, 풋고추 등 푸성귀와 된장, 고추장으로 차려지는 농촌의 밥상이 그대로 훌륭한 채식 식단이었다.
황윤 감독은 텃밭에서 거둔 작물들로 만든 음식이 얼마나 맛있고 몸에 좋은지 끝도 없이 '간증'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육식과 인스턴트 소비가 건강 문제로 되돌아오면서 다시 예전의 식생활, 건강한 채식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은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채식이 기본이어서 따로 요청해야 육식을 할 수 있고, 프랑스는 채식 급식을 의무화했으며, 캐나다의 권장식도 채식이다.
미국에서도 진보적인 주에 속하는 뉴욕이나 캘리포니아가 채식 중심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편의점에서 채식 도시락을 내놓을 정도다. 청와대 신년회에 초대받았던 황윤 감독은 "조심스럽게 요청했는데 채식 떡국을 마련해 주셨다"며 공공 급식이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족한 시간을 아쉬워하며 이야기를 풀어 놓은 황 감독의 열정과 노력은 참가자들에게도 가 닿은 듯했다.
강의가 끝나고 앞자리에 앉았던 두 중년 여성이 "그래, 고기는 좀 줄여야 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크루즈의 메인 식당 두 곳 중 한 곳이 채식 메뉴로만 차려진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식당은 붐볐다.
원래 채식을 하지 않지만, 영화를 보거나 강의를 듣고 일부러 찾은 사람들도 많았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은 기본, 버섯 튀김이나 가지 튀김, 감자 크로켓 등 채소 요리는 고기가 없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았다.
두부와 각종 나물, 김치로 푸짐하면서도 속 편한 한 끼였다. ◇ 플라스틱 없는 생활은 가능할까
환경 사진가 크리스 조던의 다큐멘터리 '알바트로스'에는 어미 새가 먹이인 줄 알고 플라스틱을 새끼에게 먹이거나 죽은 새의 배 속에 플라스틱 조각이 가득한 충격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인도나 동남아 지역의 바다와 강은 플라스틱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
고래 배 속에서 수십 ㎏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나왔다는 것은 이제 흔한 뉴스가 됐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홍수열 자원순환경제연구소 소장은 코끼리 상아 같은 사치품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탄생한 플라스틱의 역사를 훑었다.
군수용으로 사용되던 플라스틱은 세계대전 이후 대중 소비 시대가 열리자 폭발적으로 사용이 늘었다.
"플라스틱의 미래는 쓰레기통에 있다"고 생각한 산업계의 기획과 마케팅의 산물로 일회용품의 대표 주자가 된 것이다.
굳이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플라스틱의 분자 구조까지 설명한 것도 금세 납득이 됐다.
열을 가하면 녹는 열가소성 플라스틱은 재활용이 가능하지만, 열경화성 플라스틱은 한번 굳어지면 다시 녹지 않고 타서 가루가 되거나 기체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열경화성인 멜라민 수지 그릇은 재활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플라스틱 그릇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산성이나 기름기, 열을 만나면 플라스틱의 고분자 구조가 흩어져 환경 호르몬이 유출되기 때문이다.
생수를 담는 페트병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졌지만, 걸프전에 참전했던 미군이 사막에 둔 페트병에서 환경 호르몬이 검출되면서 안전한 플라스틱은 없다는 경각심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육지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플라스틱 쓰레기 중 가장 많은 것은 우수관에 버린 담배꽁초(담배 필터는 종이가 아니다)이고, 변기에 버리는 물티슈나 세탁수에 섞인 섬유 조각도 모두 미세 플라스틱이 된다.
바다에 떠다니는 것은 다 먹이인 줄 아는 해양 생물들이 섭취한 플라스틱은 그 생물을 죽이거나, 부서지고 부서져 미세 플라스틱이 되면 먹이사슬을 따라 우리 식탁으로 돌아온다.
1년 동안 신용카드 1장 정도의 미세 플라스틱이 인간의 몸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현재로선 측정이 불가능한 나노 단위의 미세 플라스틱이 정확히 얼마나 축적되는지,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조차 없다고 홍 소장은 경고했다.
실생활과 연결되는 이야기가 나오자 질문도 빗발쳤다.
주로 살림을 맡아 하는 주부는 물론, 어린 학생들까지 번쩍번쩍 손을 들고 어떻게 하면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물었다. ◇ 충격에서 시작된 변화…실천하는 사람들
몇 장의 사진과 짧은 강의로 받은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린보트 안에서의 시작은 간단하고 쉬웠다.
바로 강의를 듣는 사람들 앞에 놓인 개인용 텀블러였다.
플라스틱 생수병이 아닌 개인용 텀블러는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준비물 중 하나로 미리 공지됐다.
배 안을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텀블러를 들고 다녔다.
미처 챙겨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텀블러와 여행에 필요한 다회용품을 빌려주는 '그린 대여소'가 마련됐다.
너도나도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다 보니, 아주 가끔 종이컵이나 플라스틱 생수병이 보이면 "엥?"하고 되돌아보게 될 정도였다.
기항지인 대만에서 야시장 관광에 나설 때도 텀블러와 다회용기를 에코백에 챙겨간 사람들은 자신의 텀블러에 밀크티를 받아 마시고, 다회용기에 음식을 담아 먹었다. 일회용품 없는 카페 보틀 팩토리를 운영하는 정다운 대표와 쓰레기 없는 여행을 실천하는 와이어 아티스트 좋아은경이 좀 더 구체적인 실천적 대안을 보여줬다.
패키지 디자인을 하던 정다운 대표는 어느 날 사무실에서 쓰레기통이 모자라 주변까지 쌓여있는 테이크 아웃 커피잔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쓰레기 수거 차를 따라가서 확인한 것은 이 일회용 잔들이 재활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정 대표는 "일단 없는 게 원칙이고, 그다음에 방법을 찾았다"고 했다.
테이크 아웃을 위해 컵이나 텀블러를 제작하지는 않았다.
SNS에 취지를 설명하고 안 쓰는 텀블러를 기부해 달라는 글을 올렸더니 전국에서 600개가 모였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이곳저곳에서 받은 텀블러와 예쁘다고 산 텀블러가 대여섯개는 넘었다.
그렇게 기부받은 텀블러를 대여해주고, 플라스틱병에 담긴 탄산수 대신 탄산수 제조기를 마련했다.
종이 영수증은 요청하는 사람에게만 발행해 주고, 커피 원두도 배송을 받는 대신 가까운 로스터리에 그릇을 가져가 직접 받아오고 있다.
일상에서도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은 이어졌다.
장을 볼 때는 당연히 천 주머니를 이용하고, 반찬을 살 때도 비닐 포장된 제품을 집는 대신, 가져간 그릇에 담아달라고 요청한다.
정 대표는 사 온 음식을 그릇에 옮겨 담고, 플라스틱을 씻어서 분리 배출할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불편하지만은 않다고 했다.
그는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일회용품을 의식하고 거절하기'로 플라스틱 없는 생활을 시작해 보라고 제안했다.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작은 백팩 하나로 여행한다는 와이어 아티스트 좋아은경은 태국을 여행하면서 뜨거운 음식까지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실제 그가 여행 때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을 직접 보여줬다.
크고 잘 마르는 손수건 세 장은 때때로 빵을 담는 보자기 역할도 한다.
깊이가 있는 보관 용기 안에 어릴 적 쓰던 젓가락과 숟가락이 들어 있다.
어린이용 젓가락은 과일이나 음식을 찍어 먹는 꼬치로도 사용하고, 작은 숟가락은 아이스크림은 물론 음식도 충분히 먹을 수 있다.
텀블러는 생수용과 음료용 두 가지다.
이것들은 장바구니 하나에 쏙 들어간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팁은 '제 그릇(컵)이 있어요', '빨대(봉투)는 필요 없어요' 같은 말을 현지어로 익히는 것이다.
태국어로 이렇게 말했을 때 상인들은 모두 웃는 얼굴로 응대해준다고 한다. ◇ 무거워진 머리와 마음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
아직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흔치는 않은 크루즈 여행인데 학구열만 불태우다 갈 수는 없는 일. 무거워진 머리도 마음도 가볍게 비워줄 문화 공연들도 이어졌다.
소설가 은희경·정유정, 시인 오은이 함께 한 낭독회, 날마다 메일로 글을 보내주는 '일간 이슬아' 프로젝트로 주목받은 이슬아 작가의 북 콘서트, 그린보트의 터줏대감인 가수 이한철의 공연으로 밤의 보트는 따뜻하고 또 뜨거웠다. 참가그룹별로 진행되는 댄스 수업과 크루즈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라이브 공연, 댄스쇼, 노래방, 마술쇼도 열기를 더했다.
비싸고 느린 선내 와이파이를 연결하지 않으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대신, 밀렸던 책 몇 권을 탐독했다.
배 위에서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크루즈에서 배를 호텔로 삼고 기항지를 둘러보는 여행도 빼놓을 수 없다.
부산에서 출발한 그린보트는 44시간 만에 대만 북부의 항구 도시 지룽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가까운 수도 타이베이를 둘러보고 태평양에 면한 중부의 작은 도시 화롄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기상 상황이 악화하는 바람에 바로 제주로 향했다.
그린보트를 타고 왔으니 기왕이면 아끼고 지켜야 할 자연이 있는 곳을 찾아 무거워진 마음을 덜어냈다. 여섯번째 보트에 탄 은희경 작가 역시 평소에 찾아 듣기 쉽지 않은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동료 작가들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승객들을 만나는 일을 즐긴다고 했다.
특히 일본의 비정부기구(NGO) 피스보트와 함께 진행하는 '피스&그린보트' 때 맥주 자판기 옆에서 한국 사람만 보면 맥주를 빼주던 일본인이 기억에 남았고, 그때 들은 재일 한국인의 이야기는 언젠가 소설로 쓸 생각이라고도 했다.
이번에는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들에게 특별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그리고 은 작가의 대표작인 '새의 선물'까지.
"타인의 시각으로 나를 재단하거나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고민 끝에 고른 네 편의 소설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함께 읽고 나누는 시간이었다. ◇ 이토록 특별한 크루즈
크루즈는 '바다 위의 리조트 호텔'로 불리는 유람선 안에서 먹고, 자고, 즐기며 중간중간 들르는 기항지를 둘러보는 장기 여행이다.
한때 '호화 여행'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이유다.
환경을 주제로 한 테마 크루즈 '그린보트'는 환경 전문가를 포함한 각계 명사로 꾸린 게스트와 한배를 타고 주변국을 돌며 지구를 생각하는 환경재단의 프로그램이다.
환경재단은 2005년부터 일본 시민단체 피스보트와 함께 '피스&그린보트'를 14년째 이어왔으며, 2018년부터 '그린보트'를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다.
2020년 진행될 15회 그린보트 일정은 1월 중 그린보트 홈페이지(www.greenboat.kr)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