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후] 북한실상 알리는 '전쟁기념관 역사강사' 이효주씨
입력
수정
두 딸 미래 그리며 '투잡, 쓰리잡' 내달린 10년…"특별할 것 없는 '엄마의 힘'"
"공짜는 없지만 노력만큼 돌아오는 한국 사회, 내 힘으로 당당하게 생존하자"
"탈북민이라고 특별하지 않아요. 특별 대우를 기대해서도 안 되고,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열심히 살아야죠. 대한민국 국민 모두 열심히 살잖아요.
"
올해로 한국 정착 10년 차. 주중에는 용산 전쟁기념관의 북한역사 선생님으로, 주말에는 지역사회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아코디언 강사이자 사춘기 두 딸아이의 엄마로 눈코 뜰 새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워킹맘' 탈북민 이효주(48) 씨의 이야기다. 이 씨의 말투는 시종일관 차분했지만, 굳은 심지와 당당함이 느껴졌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지만, 그 어떤 것도 거저 얻는 것은 없어요.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해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또 내 몫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지난 5일 낮 전쟁기념관 구내 카페에서 만난 이 씨. 음료를 주문하며 '직원 할인'을 살뜰히 챙기는 그에게서 이제는 '대한민국 직장인 N년차'의 능숙함마저 묻어났다. 이 씨의 남한 생활이 처음부터 이토록 자연스러웠을 리는 없다.
2011년 4월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7살, 9살 딸아이의 손을 잡고 건너와 맨몸으로 시작한 남쪽 생활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함경북도 청진의 한 중학교에서 십여년간 교편을 잡았던 이 씨가 탈북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부터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고 한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안정적인 생활이었기에 탈북까지 고민이 많았어요.
먼저 탈북한 시댁으로 인해서 딸들에게 연좌제가 씌워진 상황에 남한행을 결심했습니다.
"
그렇게 북한을 떠나 태국을 거쳐 2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비교적 수월한 탈북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만큼 남쪽에서 맞닥뜨린 현실의 벽은 더 높았다.
"탈북 당일 아침까지도 출근하고 수업을 했어요.
스스로 목적을 갖고 계획했던 탈북이 아니었기에, 준비가 부족했어요.
한국 사회를 너무 몰랐습니다.
"
하나원(북한이탈주민이 입국한 뒤 사회적응 교육을 받는 기관)에서 나온 직후 이 씨의 생활은 당장 생계를 위한 '투잡, 쓰리잡'의 연속이었다.
감자탕집에서 서빙하고, 탈북민 민속예술단원으로 전국 방방곡곡 행사장을 찾아다녔다.
배움도 계속되어야 했다.
각종 공과금 고지서는 쏟아지는데 어디서 어떻게 내는 것인지, '돈을 쪼개서 살아야 한다'는데 적금, 보험 모든 게 '외계어'였다.
"학교를 졸업하면 직장에 '배치'되고, 정해진 시나리오대로만 따라가면 되는 북한과는 너무 달랐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잖아요.
"
하지만 냉엄한 경쟁사회의 이면에는 분명한 과실이 있었다.
"북에서는 일을 열심히 해도 제때 쌀 1㎏을 못 받을 때가 허다했는데, 남에서는 일을 하면 한 만큼 '따박따박' 돈이, 대가가 주어지더라고요.
그게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어요.
더 열심히, 더 잘하고 싶어졌어요.
" 2012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북한교육 전문강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응시했고, 다른 10명의 탈북민과 함께 계약직 '시간강사'로 채용됐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3년의 계약기간을 거쳐 2016년 정규직 전환에 성공했다.
올해 현재 전쟁기념관 직원 160여명 중 탈북민 출신은 이 씨가 유일하다.
비결을 묻자 "그저 천성이 학생들과 함께할 사람이었던 것 같다"며 겸손하게 답했다.
초·중·고교생과 대학생, 일반 성인은 물론 군인, 교원 등 다양한 참관자를 대상으로 북한 실상을 알려주는 게 이 씨의 업무이다.
탈북민 출신이 북한 이야기를 하는 게 뭐 그리 어렵겠냐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동의 자유가 없는 북한 체제 특성상 일반 주민이 북한 전체를 다 알기는 어려워요.
저 역시 남한에 와서 수업을 준비하면서 북한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걸요.
"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날마다 책을 읽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시간을 쪼개어 북한대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전쟁기념관이 진행하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중 이 씨가 맡은 프로그램은 총 6개. 지난 한 해 108회에 걸쳐 강의했고, 총 7천322명이 참여했다. 이 씨에게 남한 사회에서의 첫 정식 직장으로서 큰 '도전'이었던 전쟁기념관은 이제 '터전'이 되었다.
"이곳에서 정착했고, 모든 것을 이겨냈어요.
천둥벌거숭이나 다름없었던 저를 묵묵히 지켜봐 주고 노력을 인정해준 직장 동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고, 제 딸들이 안정적으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
성공적인 정착을 꿈꾸는 '후배 탈북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한 마디를 물었다.
그는 "탈북민으로서 '특별 대우'를 기대하지 않길 바란다"고 힘주어 답했다.
"탈북민을 평범한 대한민국 시민 한 사람으로 바라봐주길 원한다면, 탈북민 스스로도 특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똑같이 치열하고 당당하게 생존해야죠."
"한국 사회는 이미 탈북민을 위해 많은 물질적 지원을 하고 있어요.
도움에만 의존하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집니다.
내 힘으로 일어서는 기쁨, 나아가 사회에 환원하는 보람도 모두 느껴보길 바랍니다.
" 어느덧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당당한 노년'을 꿈꾸는 이 씨의 가슴은 아직도 소녀 같은 지적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하다.
"수업에서 학생들이 졸지 않으려면 시각자료 하나도 더 재미나게 만들어야 하잖아요.
영상작업, 일러스트, 엑셀, 배우고 싶은 것 천지예요"라며 눈을 반짝였다.
주말이 되면 각종 봉사활동에도 열성이다.
북한 사범대에서 아코디언을 전공한 그는 '재능기부'에 앞장서고 있다.
서울 신도림 소재 탈북민 청소년 대상 대안학교부터 대전에 있는 자원봉사활동 단체, 지역사회 어르신 대상 교습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걸음이 안 닿는 곳이 없다.
언젠가 정식으로 학원을 열어 남한에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한 아코디언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게 이 씨의 또 다른 꿈이다.
숨 가쁜 스케줄 속에서도 가장 어려운 과제는 '엄마 공부'라며 한숨을 내쉬는 이 씨. 이 또한 사춘기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여느 엄마들과 다르지 않다.
엄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남한의 문화를 흡수하는 아이들을 좇아가기 위해서 많은 대화가 필요했고, 가족의 노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방탄소년단(BTS)에 푹 빠져 사는 딸들 때문에 걱정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면서 "아이들이 고등학교만 건강하고 바르게 마치면 그때부터는 '이제 엄마 꿈을 펼치겠노라'고 선포를 했는데, 눈도 깜짝 안 하더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직장 동료들도, 제 수업에 참여했던 학부모들도 이런 제 고민에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대한민국 엄마들 다 똑같아요.
힘내세요!'였어요.
다시 한번 느꼈어요. 아, 똑같구나…. 징글징글한 딸내미들 덕분에 진정한 '한국인'이 된 셈이죠."
/연합뉴스
"공짜는 없지만 노력만큼 돌아오는 한국 사회, 내 힘으로 당당하게 생존하자"
"탈북민이라고 특별하지 않아요. 특별 대우를 기대해서도 안 되고,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열심히 살아야죠. 대한민국 국민 모두 열심히 살잖아요.
"
올해로 한국 정착 10년 차. 주중에는 용산 전쟁기념관의 북한역사 선생님으로, 주말에는 지역사회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아코디언 강사이자 사춘기 두 딸아이의 엄마로 눈코 뜰 새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워킹맘' 탈북민 이효주(48) 씨의 이야기다. 이 씨의 말투는 시종일관 차분했지만, 굳은 심지와 당당함이 느껴졌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지만, 그 어떤 것도 거저 얻는 것은 없어요.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해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또 내 몫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지난 5일 낮 전쟁기념관 구내 카페에서 만난 이 씨. 음료를 주문하며 '직원 할인'을 살뜰히 챙기는 그에게서 이제는 '대한민국 직장인 N년차'의 능숙함마저 묻어났다. 이 씨의 남한 생활이 처음부터 이토록 자연스러웠을 리는 없다.
2011년 4월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7살, 9살 딸아이의 손을 잡고 건너와 맨몸으로 시작한 남쪽 생활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함경북도 청진의 한 중학교에서 십여년간 교편을 잡았던 이 씨가 탈북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부터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고 한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안정적인 생활이었기에 탈북까지 고민이 많았어요.
먼저 탈북한 시댁으로 인해서 딸들에게 연좌제가 씌워진 상황에 남한행을 결심했습니다.
"
그렇게 북한을 떠나 태국을 거쳐 2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비교적 수월한 탈북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만큼 남쪽에서 맞닥뜨린 현실의 벽은 더 높았다.
"탈북 당일 아침까지도 출근하고 수업을 했어요.
스스로 목적을 갖고 계획했던 탈북이 아니었기에, 준비가 부족했어요.
한국 사회를 너무 몰랐습니다.
"
하나원(북한이탈주민이 입국한 뒤 사회적응 교육을 받는 기관)에서 나온 직후 이 씨의 생활은 당장 생계를 위한 '투잡, 쓰리잡'의 연속이었다.
감자탕집에서 서빙하고, 탈북민 민속예술단원으로 전국 방방곡곡 행사장을 찾아다녔다.
배움도 계속되어야 했다.
각종 공과금 고지서는 쏟아지는데 어디서 어떻게 내는 것인지, '돈을 쪼개서 살아야 한다'는데 적금, 보험 모든 게 '외계어'였다.
"학교를 졸업하면 직장에 '배치'되고, 정해진 시나리오대로만 따라가면 되는 북한과는 너무 달랐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잖아요.
"
하지만 냉엄한 경쟁사회의 이면에는 분명한 과실이 있었다.
"북에서는 일을 열심히 해도 제때 쌀 1㎏을 못 받을 때가 허다했는데, 남에서는 일을 하면 한 만큼 '따박따박' 돈이, 대가가 주어지더라고요.
그게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어요.
더 열심히, 더 잘하고 싶어졌어요.
" 2012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북한교육 전문강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응시했고, 다른 10명의 탈북민과 함께 계약직 '시간강사'로 채용됐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3년의 계약기간을 거쳐 2016년 정규직 전환에 성공했다.
올해 현재 전쟁기념관 직원 160여명 중 탈북민 출신은 이 씨가 유일하다.
비결을 묻자 "그저 천성이 학생들과 함께할 사람이었던 것 같다"며 겸손하게 답했다.
초·중·고교생과 대학생, 일반 성인은 물론 군인, 교원 등 다양한 참관자를 대상으로 북한 실상을 알려주는 게 이 씨의 업무이다.
탈북민 출신이 북한 이야기를 하는 게 뭐 그리 어렵겠냐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동의 자유가 없는 북한 체제 특성상 일반 주민이 북한 전체를 다 알기는 어려워요.
저 역시 남한에 와서 수업을 준비하면서 북한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걸요.
"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날마다 책을 읽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시간을 쪼개어 북한대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전쟁기념관이 진행하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중 이 씨가 맡은 프로그램은 총 6개. 지난 한 해 108회에 걸쳐 강의했고, 총 7천322명이 참여했다. 이 씨에게 남한 사회에서의 첫 정식 직장으로서 큰 '도전'이었던 전쟁기념관은 이제 '터전'이 되었다.
"이곳에서 정착했고, 모든 것을 이겨냈어요.
천둥벌거숭이나 다름없었던 저를 묵묵히 지켜봐 주고 노력을 인정해준 직장 동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고, 제 딸들이 안정적으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
성공적인 정착을 꿈꾸는 '후배 탈북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한 마디를 물었다.
그는 "탈북민으로서 '특별 대우'를 기대하지 않길 바란다"고 힘주어 답했다.
"탈북민을 평범한 대한민국 시민 한 사람으로 바라봐주길 원한다면, 탈북민 스스로도 특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똑같이 치열하고 당당하게 생존해야죠."
"한국 사회는 이미 탈북민을 위해 많은 물질적 지원을 하고 있어요.
도움에만 의존하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집니다.
내 힘으로 일어서는 기쁨, 나아가 사회에 환원하는 보람도 모두 느껴보길 바랍니다.
" 어느덧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당당한 노년'을 꿈꾸는 이 씨의 가슴은 아직도 소녀 같은 지적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하다.
"수업에서 학생들이 졸지 않으려면 시각자료 하나도 더 재미나게 만들어야 하잖아요.
영상작업, 일러스트, 엑셀, 배우고 싶은 것 천지예요"라며 눈을 반짝였다.
주말이 되면 각종 봉사활동에도 열성이다.
북한 사범대에서 아코디언을 전공한 그는 '재능기부'에 앞장서고 있다.
서울 신도림 소재 탈북민 청소년 대상 대안학교부터 대전에 있는 자원봉사활동 단체, 지역사회 어르신 대상 교습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걸음이 안 닿는 곳이 없다.
언젠가 정식으로 학원을 열어 남한에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한 아코디언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게 이 씨의 또 다른 꿈이다.
숨 가쁜 스케줄 속에서도 가장 어려운 과제는 '엄마 공부'라며 한숨을 내쉬는 이 씨. 이 또한 사춘기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여느 엄마들과 다르지 않다.
엄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남한의 문화를 흡수하는 아이들을 좇아가기 위해서 많은 대화가 필요했고, 가족의 노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방탄소년단(BTS)에 푹 빠져 사는 딸들 때문에 걱정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면서 "아이들이 고등학교만 건강하고 바르게 마치면 그때부터는 '이제 엄마 꿈을 펼치겠노라'고 선포를 했는데, 눈도 깜짝 안 하더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직장 동료들도, 제 수업에 참여했던 학부모들도 이런 제 고민에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대한민국 엄마들 다 똑같아요.
힘내세요!'였어요.
다시 한번 느꼈어요. 아, 똑같구나…. 징글징글한 딸내미들 덕분에 진정한 '한국인'이 된 셈이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