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단절' 선언한 이재용…"국격에 맞는 새로운 삼성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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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승계' 사회적 논란 털고6일 오후 3시. 삼성전자 서울 서초사옥 6층 다목적홀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들어섰다. 감색 슈트에 사선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맨 이 부회장의 얼굴은 비장했다.
경영 성과로 정면승부 의지
'국격' 재차 강조
내부 만류에도 가족승계 포기 결정
단상 앞에 선 이 부회장은 차분한 어조로 사과문을 읽어내려 갔다. “저의 잘못입니다. 사과드립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편법 승계, 무노조 경영 문제와 관련한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발표 도중 고개를 숙인 것만 세 번이었다.예상보다 빠른 대국민 사과
이 부회장은 지난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정한 대국민 사과의 2차 기한인 이달 11일을 닷새 남긴 6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준법감시위 정례회의인 7일 사과문을 발표할 것이라는 예상을 깬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끝나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해 그룹 차원의 입장문을 내거나 온라인 회견을 열 것이라는 관측도 빗나갔다. ‘마지못해 하는 사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이날 이 부회장의 사과문에는 ‘국격’이라는 키워드가 두 번 등장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 속에 희생하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 시민을 보면서 진정한 국격이 무엇인지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국격에 어울리는 새로운 삼성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밝혔다.사과문엔 변명이 없었다. “의도치 않았다” “사실여부와 관계없이”와 같은 뒷말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는 “저와 삼성을 둘러싸고 제기된 많은 논란은 근본적으로 경영권 승계에서 비롯된 게 사실”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노조 문제와 관련해서도 삼성에버랜드, 삼성전자서비스 등 구체적인 사건을 언급하며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다. 이어 “그동안 삼성 노조문제로 인해 상처 입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한 뒤 허리를 굽혔다.
재계 관계자는 “편법 승계, 무노조 경영 등은 이병철 선대 회장의 유산으로 이 부회장으로선 억울할 수도 있는 대목”이라며 “삼성이라는 조직이 더 이상 경영 외적인 요인으로 흔들려선 곤란하다고 판단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고 말했다.
참모진 반대에도 “오랜 생각”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것도 이번 대국민 사과의 특징으로 꼽힌다. 경영권 승계 문제로 더 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 뒤 자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가족 승계의 대안도 제시했다. 이 부회장은 “성별과 학벌, 국적을 불문하고 훌륭한 인재를 모셔와야 한다”며 “그 인재들이 주인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치열하게 일하면서 저보다 중요한 위치에서 사업을 이끌어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과문 작성 과정에서 강한 반대와 우려의 의견이 쏟아졌다는 후문이다. 이 부회장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고, 이와 관련한 내 의지는 확고하다”며 참모진을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사 상생을 도모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노동법령을 준수하고, 노동 3권을 보장하겠다”는 약속도 내놨다. 준법문화를 삼성에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준법감시위원회를 재판이 끝난 뒤에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이 부회장은 승계와 관련해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6년여 동안 삼성을 이끌어 온 경험에 대한 소회와 포부도 밝혀 주목을 받았다. 1991년 삼성에 입사한 이 부회장은 부친인 이건희 회장의 가르침은 물론 다양한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교류하며 삼성의 미래를 준비해 왔다.
그는 1993년 ‘신경영’이 시작되며 삼성이 일본 전자업체의 하청업체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과정을 지켜봤고, 삼성전자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2000년대 후반 이후 휴대폰 시장의 라이벌이던 노키아가 몰락하며 애플이 도약하고, 중국 정보기술(IT)산업이 도약하는 과정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이 부회장의 이날 ‘선언’은 80년 삼성의 전통은 물론 ‘한국적 정서’와도 과감하게 결별하고, 삼성의 ‘규모와 업’에 맞는 최고 수준의 경영을 통해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재계 관계자는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권리를 포기한다기보다는 삼성의 도약을 위한 새로운 선택임을 강조한 것”이라며 “준법감시위 권고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에 대한 대답이고 비전”이라고 평가했다.
이수빈/송형석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