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 어려워"…한명숙 사건 공수처 가나(종합)

한만호 비망록 과거 재판에 제출…"당장 재심 사유 안된다"
회유·협박 입증할 증거 있어야…법무부 자체 진상조사 여지
여권이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을 재조사하라고 요구하면서 수사나 재심 청구 등 후속조치가 이뤄질지 주목된다. 검찰 안팎에서는 이같은 요구가 당시 수사와 공판에 참여한 검사들을 이르면 올해 7월 출범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대상으로 삼기 위한 포석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일단 한 전 총리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이 당장 재심 절차를 밟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형사소송법은 ▲ 증거 위조·변조 ▲ 허위 증언·감정·통역·번역 ▲ 무고 등이 다른 사건의 확정판결로 증명된 때 등으로 재심 사유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새로운 증거가 발견됐다면 무죄 또는 면소를 인정할 만큼 명백한 수준이어야 한다.

재조사 요구를 촉발한 고 한만호씨의 비망록은 한 전 총리의 재판에 이미 증거로 제출됐다.

검찰은 한씨가 한 전 총리에게 9억원을 줬다는 진술을 번복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망록을 작성했다고 봤다. 이에 따라 기존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할 정황 증거로 법정에 제출해 사법부 판단을 받았다는 입장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한 전 총리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은 물론 한씨의 위증 사건까지 이중으로 대법원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에 비망록만으로는 재심이 개시되기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직무에 관한 죄로 확정판결을 받은 경우도 재심 청구가 가능하다.

당시 수사팀이 한씨를 회유 또는 협박해 진술을 받아낸 혐의로 기소돼 유죄가 확정되면 한 전 총리의 재심이 이뤄질 수도 있다.

검찰 또는 공수처 수사가 재심으로 가는 우회로가 되는 셈이다.

여권도 재심보다는 공수처 수사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이날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재심을 통해 재판 결과를 뒤집는다 안 뒤집는다 이런 얘기들이 언론에서 많이 나오는데 그런 건 굉장히 나중 일"이라며 "그걸 지금부터 염두에 두고 뭔가 이뤄져야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공수처 수사에 대해서는 "수사 범위에 들어가는 건 맞다"며 "공수처는 독립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공수처 판단에 달린 문제"라고 했다.

검찰 수사가 부적절했다는 지적은 2015년 8월 한 전 총리의 유죄를 확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나온 바 있다.

당시 대법관 5명은 "한만호가 허위나 과장 진술을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일단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진술을 하자 이를 기화로 검사가 한만호의 진술이 번복되지 않도록 부적절하게 애쓴 흔적이 역력한 사안"이라는 소수의견을 냈다.
다만 여기서 나아가 회유·협박 등 강압수사가 있었더라도 피해자에 해당하는 한씨가 이미 사망해 비망록에 담긴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당시 수사팀은 "검찰에서는 강압수사나 증인을 힘들게 하거나 이런 적은 전혀 없습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너무 잘해주셔서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한씨 자신의 법정 진술을 반대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직권남용(7년) 등 공수처가 수사할 수 있는 범죄의 공소시효도 대부분 완성됐다.

고검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폭행이나 협박으로 증거가 조작됐다면 기존 재판에서 얼마든지 탄핵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합법적 증거인지 검증해 문제없이 유죄가 확정된 만큼 지금 와서 폭행이나 협박을 입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법무부가 자체적으로 진상규명 작업에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전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검찰개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제도 개선을 위해서도 구체적이고 정밀한 조사 필요가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3∼5년인 검사 징계시효가 지나 감찰 착수가 사실상 불가능한 데다 휘발성이 큰 사안인 만큼 법무부 차원의 진상조사나 공수처 수사 역시 정치적 부담이 만만찮을 것이라는 반론이 나온다.

과거 인권침해나 수사권 남용 논란을 일으킨 사건들에 대한 검증이 문재인 정부 들어 이미 한 차례 끝난 점도 법무부가 재조사 요구에 선뜻 응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는 2017년 12월부터 작년 5월까지 활동하며 ▲ PD수첩 사건 ▲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 사건 ▲ 유우성씨 증거조작 사건 등 17건을 조사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 등 일부는 재수사로 이어졌지만 한 전 총리 사건은 조사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청장 출신인 김종민 변호사는 "한씨가 강압에 의해 허위진술을 했는지가 재판기록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걸로 재심 여부를 판단하면 되지 공수처에 고소고발을 해서 수사팀을 조사한다는 건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법무부 장관이 나서 감찰을 하거나 진상조사단을 꾸린다면 사법질서를 보호하는 직무와 역할을 포기하는 행태"라고 지적했다. 김한규 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은 "공수처는 독립기관인데 집권 여당이 이렇게 나서는 건 도입 취지에 반하고 범죄 혐의도 명확하지 않다"며 "추 장관이 뭔가 해보겠다면 진상조사단을 꾸려 조사하는 게 마지노선 같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