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없었다" 위증한 안기부 수사관, 34년 만에 실형 선고

서울중앙지법 형사10단독 변민선 부장판사는 지난 24일 위증 혐의로 기소된 전 안기부 수사관 구모(77)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사진=연합뉴스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고문 피해를 본 고(故) 심진구 씨의 재심에서 "고문이 없었다"고 증언한 옛 안기부 수사관이 위증죄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공소시효가 끝나 고문에 대한 처벌을 면했지만,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했다가 사건 발생 34년 만에 구속된 것이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10단독 변민선 부장판사는 지난 24일 위증 혐의로 기소된 전 안기부 수사관 구모(77)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구씨는 실형이 선고됨에 따라 법정에서 구속됐다.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당시 안기부 수사관이었던 구씨는 안기부가 심씨를 영장 없이 연행해 고문한 사실을 알고도 심씨의 재심 공판이 열린 2012년 4월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위증한 혐의로 기소됐다.

노동운동을 하던 심씨는 주사파 운동권의 대부이자 '강철서신' 저자인 김영환 씨와 4개월 동안 함께 자취했던 사실이 드러나 1986년 12월 안기부 남산 분실에 영장 없이 연행돼 37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안기부는 심씨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폭행하고 잠을 재우지 않는 등 가혹행위를 했고, 심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1987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2년이 확정됐다.심씨는 1999년 한 월간지를 통해 안기부에서 가혹행위를 받았다고 고백했고, 이후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를 거쳐 재심을 청구해 2013년 무죄 판결을 확정받았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심씨에게 저지른 고문 등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이 불가능했다.

구씨는 심씨의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직접 심씨를 고문하거나 같은 수사1과 수사관들이 고문한 사실을 아는지 묻자 "고문한 적이 없다" 거나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다.아울러 구씨는 "피고인(심씨)이 수사 과정에서 시종일관 자백했고 다툼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심씨는 무죄 판결이 확정된 이후인 2014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심씨의 딸은 구씨의 위증죄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직전인 2019년 3월 구씨를 위증죄로 고소했다.

재판부는 "심씨가 조사 당시 구씨 등 안기부 수사관들로부터 가혹행위를 받은 점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며 유죄를 인정했다.그러면서 "수사관이 국민을 상대로 한 불법 구금, 고문 또는 가혹행위는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중대 범죄이자 반인륜 범죄임이 분명하고 엄하게 처벌함이 마땅하다"며 "그런데도 심씨의 가혹행위는 공소시효가 완료돼 처벌할 수 없게 됐다"고 전했다.

또 "심씨는 이미 숨져 구씨의 참회나 사죄를 받을 기회조차 없게 됐다"며 "구씨는 34년 동안 심씨와 가족들에게 사과하거나 자신의 범죄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법의 심판을 피하려 했으며 심씨의 진술이 허위라고 주장하는 등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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