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마라토너' 최윤칠 고문 별세…아시안게임 첫 金 주인공

1948년 런던에선 1위로 달리다가 38㎞ 근육 경련…1952년 헬싱키 4위
1950년 보스턴 마라톤 3위…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 금메달 수확
'불운한 마라토너'로 불렸지만, 한국 스포츠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룬 최윤칠 대한육상연맹 고문이 별세했다. 최윤칠 고문은 8일 오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했다.

유족은 "고인은 마지막까지 한국 육상과 스포츠가 발전하는 모습을 기원했다"고 전했다. 1928년 7월 19일 함남 단천군에서 태어난 최윤칠 고문은 10세 때부터 '장거리, 마라톤 신동'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남북 최정상급 장거리 선수로 평가받은 최윤칠 고문은 1945년 해방 후 더 힘을 냈다.

1948년 6월 당대 최고 마라톤 스타였던 고 서윤복 선생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1948년 런던올림픽 출전권을 손에 넣었다. 20박 21일의 고된 여정 끝에 런던에 도착한 최윤칠 고문은 1948년 8월 7일 열린 런던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해 38㎞까지 선두로 달렸다.

하지만, 근육 경련 탓에 결승선을 3㎞ 정도 앞두고 기권했다.

최윤칠 고문이 35㎞를 2시간06분02초, 1위로 통과한 것을 증명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게 고인은 한국 선수들이 태극기를 달고 출전한 첫 올림픽에서 메달리스트가 될 기회를 놓쳤다.
최윤칠 고문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완주에 성공했지만, 아쉽게 시상대에 서지 못했다.

최윤칠 고문은 2시간26분36초로 3위 구스타프 얀슨(2시간26분07초)에 29초 느린 4위로 레이스를 마쳤다.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육상 관계자는 "'최윤칠 고문이 레이스 중에 '현재 3위다'라는 말을 듣고 순위를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3명이 최윤칠 고문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최윤칠 고문에게 중간 순위를 알려준 사람이 착각을 했던 것이다"라고 전했다.

올림픽에서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최윤칠 고문은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을 연출했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안고 출전한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에서 최윤칠 고문은 육상 1,500m에 출전해 3분56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가 아시안게임에서 따낸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고인은 5,000m에서도 15분00초로 2위를 차지했다.

그에 앞서 최윤칠 고문은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 함기용, 송길윤에 이어 3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최윤칠 고문은 은퇴 후에도 한국 마라톤 대표팀 코치, 육상대표팀 코치로 일했다. 눈을 감기 전까지도 고인은 가족, 지인과 한국 육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