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in제주] '이재수의 난' 120주년…"갈등 넘어 화해·상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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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문화와 토착문화 충돌 그리고 '교폐'와 '세폐'로 불거진 민란
제주도민-천주교 화해 선언 "추모하고 기억…잊지 않겠다"
제주 근대화 과정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이재수의 난'이 내년이면 120주년을 맞는다. 이재수의 난은 20세기 벽두에 제주에서 발생한 민란이다.
천주교라는 외래 종교와의 갈등과 세금징수의 폐단 등이 서로 관계를 이루며 민란의 원인이 됐고, 그 규모가 전에 없이 컸다.
특히, 일개 관노의 지위에서 민란의 지도자인 장두(狀頭)를 자청해 죽음의 길로 나간 이재수는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더욱 주목받았다. 제주 출신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이정재·심은하 주연의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더 알려진 민란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 극심했던 교폐·세폐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 세워진 삼의사비(三義士碑) 뒷면에 새겨진 비문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은 '이재수의 난'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의 교세 확장 과정에서 발생한 폐단인 '교폐'(敎弊)와 세금징수의 폐단인 '세폐'(稅弊)가 원인이 돼 1901년 발생했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까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학살당하는 등 천주교는 극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1886년 조불수호조약 등이 체결되면서 천주교는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됐다. 당시 고종은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에게 '여아대(如我待, 나를 대하듯 하라)'라는 특별한 증표를 내렸다.
이 증표를 가진 천주교 신부들은 사실상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며 전국으로 포교 활동을 했고, 1899년에는 급기야 제주까지 내려왔다.
당시 조선 사람도 천주교로 개종하기만 하면 천주교 신부를 등에 업고 특혜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의 횡포를 견디지 못한 많은 제주 주민들이 천주교로 개종했다. '1901년 제주민란 연구'(박찬식 저)에 따르면 1900년 3월만 하더라도 5명에 불과한 신자 수가 1901년에는 242명의 영세자와 600∼700명의 예비신자로 크게 늘었다.
하지만, 천주교가 제주에서 교세를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문화적 충돌이 일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제주 사람들을 '거칠고 미개하며 배타적이고, 미신에만 열중하는' 야만인이자 선교를 통해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봤다.
이들은 제주의 전통적인 토착문화, 무속신앙, 관습 등을 모두 배척하고 천주교의 가치 질서 아래 제주 사회를 재편하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의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神木)을 베어버리는 등 무리한 포교가 이뤄졌다.
동시에 대한제국 선포 후 조세개혁에 따른 폐단도 기승을 부렸다.
대한제국은 부족한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지방 관아에서 징수하던 각종 세금인 일종의 지방세를 황실 재정으로 바꾸고, 이를 거둬들이기 위해 봉세관(세금 징수관) 강봉헌을 제주에 파견했다.
강봉헌의 입도 시기는 1899년 음력 11월, 공교롭게도 천주교의 제주 전파 시기와 비슷했다.
그는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기존 세금에다 어장·그물·소나무·목초지 등에도 새로 세금을 매기며 무리한 징세를 감행, 민생을 파탄에 빠트렸다.
천주교 신자인 강봉헌은 당시 "원주민 천주교도에겐 세금을 면제해주겠다"고 하며 제주의 천주교도들을 세금징수에 이용했다.
결국 이들의 횡포가 극심해 주민들을 격분하게 했다. ◇ 민란의 발생과 이재수의 등장
'교인 고인관이 봉세관(세금 징수관)의 명령이라 칭하고 어망세 25냥을 받아 갔다.
'
'교인 강기봉이 교인을 빙자해 동족인 여인을 강간하고 아이를 낳게 하는 등 사악한 폐습을 저질렀다.
'
'수백 금의 큰 비용을 들여 오조리에 서낭당을 지었는데 교인 이기선이 여러 교도를 풀어 거리낌 없이 방화하고 나무를 베어 실어 갔다.
'
제주목 관하 제주·정의·대정 3군의 교폐 사실을 조사해 묶은 보고서인 '삼군교폐사실성책'(三郡敎弊査實成冊)을 보면 당시 '교폐'와 '세폐'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폐단이 누적되자 1901년 5월 초 대정지역 사람들은 '상무사'라는 조직을 만들어 민회(民會)를 개최했다.
이들은 지역의 향장(鄕長)인 오대현을 장두로 내세우고, 세폐의 시정을 요구하는 건의문을 제주목사에게 제출하기 위해 동진과 서진으로 나누어 제주읍성을 향해 출발했다.
천주교 측은 민란이 일어났다고 보고 무장을 하고, 민회를 습격해 장두인 오대현을 비롯한 6명을 체포해갔다. 이때 장두 오대현을 대신해 등장한 사람이 바로 관노 출신인 이재수였다.
관노 출신이 장두가 된 것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없었던 일로, 민란 지도부의 계급적 성격이 바뀐 것이다.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은 5월 16일 제주성 외곽 황사평에 집결하고 성을 포위했다.
제주목사와 봉세관 강봉헌은 일찌감치 제주를 떠나 피신했고, 제주군수는 나중에 도망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민군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대포를 설치한 천주교민과 지루한 공방전을 계속 벌였다.
팽팽하던 균형은 성내 사람들이 민군에 호응해 성문을 열면서 깨졌다.
천주교에서 천대하고 이단으로 내몰았던 기생과 무녀들이 앞장서서 성문을 연 것이다.
제주성에 입성한 이재수는 관덕정 광장에서 천주교민을 직접 처형했다.
하지만 6월이 되자 프랑스 군함이 들이닥쳤다.
대한제국의 군대도 파견됐다.
결국 이재수를 비롯한 민군 지도부는 체포됐고 백성들은 흩어졌다.
이재수 등은 서울로 압송돼 근대식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했다.
이재수는 재판 중 최후 진술에서 "내가 죽인 것은 '역적'이지 '양민'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고 한다. ◇ 화해, 그리고 화합과 상생의 길
1901년 20세기 벽두부터 조선이라는 세계의 변방이자 조선 안에서도 최후 변방인 제주에서 벌어진 이재수의 난.
이 민란은 외래문화와 토착문화, 외세와 대한제국, 국가와 지방 사이의 충돌로 빚어진 총체적 사건이다.
제주도민과 연구자 등은 이 민란을 '반제국, 반침략적 민중항쟁', '기존 향촌 질서를 어지럽힌 부당한 간섭에 대한 저항', '중앙정부의 차별과 소외에 대한 저항'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한편, 천주교 측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받은 '신축교난'(辛丑敎難) 또는 '신축교안'(辛丑敎案)으로 봤다.
이러한 입장 차이로 생긴 갈등의 골은 깊었다.
1961년에 민란의 세 장두 이재수·오대현·강우백을 기려 건립된 '제주대정군삼의사비'가 원래 있었던 대정 홍살문 거리에서 이리저리 옮겨지다 결국 땅속에 묻혔고, 1997년에는 대정청년회가 비를 새로 건립했다.
그 과정에서 천주교와 많은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대화를 통해 화해로 이어지게 된다.
지난 1999년 천주교 제주선교 100주년 맞아 천주교 제주교구는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과거 교회사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정리하는 시도를 벌였다. 이어 2001년 이재수의 난 100주년을 맞아 태동한 기념사업회는 민란을 '제주항쟁'이라 명명하며, 로마교황과 한국천주교회, 프랑스 정부에 대해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이재수의 난 역사적 진실규명 등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채택해 발송하기도 했다.
결국, 지난 2003년 11월 천주교 제주교구와 제주도민을 대표한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는 '신축년 제주항쟁 102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을 채택했다.
양측은 선언문을 통해 '상호 존중의 기조 위에 과거사의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힐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제주 공동체의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노력한다'고 다짐했다.
천주교 제주교구 제5대 교구장이 된 문창우 비오 주교는 지난달 13일 주교 착좌식을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내년이면 이재수의 난 120주년을 맞는다.
1901년 제주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가 충돌했던 사건으로 그간 여러 심포지엄을 통해 2003년에는 화해 선언문을 나눴다"고 말했다.
문 주교는 "그러한 여정과 연결해 내년에는 심포지엄만이 아니라 관덕정과 황사평, 하논본당 등 과거 아픔이 있었던 곳에서 기념비 제막 등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황사평은 신축교안 때 민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보상적인 차원에서 땅을 받아 그곳에 천주교 교인들의 묫자리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문 주교는 "천주교인으로서 제주도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고 서로 추모하는 것이다. 황사평에 '화해의 탑 성당' 조성으로 제주도민과 천주교인들의 충돌을 기억하고 추모하면서 제주도민들의 아픔과 역사를 잊지 않고, 늘 변화하고 쇄신해나가는 공동체가 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제주도민-천주교 화해 선언 "추모하고 기억…잊지 않겠다"
제주 근대화 과정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이재수의 난'이 내년이면 120주년을 맞는다. 이재수의 난은 20세기 벽두에 제주에서 발생한 민란이다.
천주교라는 외래 종교와의 갈등과 세금징수의 폐단 등이 서로 관계를 이루며 민란의 원인이 됐고, 그 규모가 전에 없이 컸다.
특히, 일개 관노의 지위에서 민란의 지도자인 장두(狀頭)를 자청해 죽음의 길로 나간 이재수는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더욱 주목받았다. 제주 출신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이정재·심은하 주연의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더 알려진 민란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 극심했던 교폐·세폐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 세워진 삼의사비(三義士碑) 뒷면에 새겨진 비문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은 '이재수의 난'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의 교세 확장 과정에서 발생한 폐단인 '교폐'(敎弊)와 세금징수의 폐단인 '세폐'(稅弊)가 원인이 돼 1901년 발생했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까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학살당하는 등 천주교는 극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1886년 조불수호조약 등이 체결되면서 천주교는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됐다. 당시 고종은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에게 '여아대(如我待, 나를 대하듯 하라)'라는 특별한 증표를 내렸다.
이 증표를 가진 천주교 신부들은 사실상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며 전국으로 포교 활동을 했고, 1899년에는 급기야 제주까지 내려왔다.
당시 조선 사람도 천주교로 개종하기만 하면 천주교 신부를 등에 업고 특혜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의 횡포를 견디지 못한 많은 제주 주민들이 천주교로 개종했다. '1901년 제주민란 연구'(박찬식 저)에 따르면 1900년 3월만 하더라도 5명에 불과한 신자 수가 1901년에는 242명의 영세자와 600∼700명의 예비신자로 크게 늘었다.
하지만, 천주교가 제주에서 교세를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문화적 충돌이 일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제주 사람들을 '거칠고 미개하며 배타적이고, 미신에만 열중하는' 야만인이자 선교를 통해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봤다.
이들은 제주의 전통적인 토착문화, 무속신앙, 관습 등을 모두 배척하고 천주교의 가치 질서 아래 제주 사회를 재편하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의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神木)을 베어버리는 등 무리한 포교가 이뤄졌다.
동시에 대한제국 선포 후 조세개혁에 따른 폐단도 기승을 부렸다.
대한제국은 부족한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지방 관아에서 징수하던 각종 세금인 일종의 지방세를 황실 재정으로 바꾸고, 이를 거둬들이기 위해 봉세관(세금 징수관) 강봉헌을 제주에 파견했다.
강봉헌의 입도 시기는 1899년 음력 11월, 공교롭게도 천주교의 제주 전파 시기와 비슷했다.
그는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기존 세금에다 어장·그물·소나무·목초지 등에도 새로 세금을 매기며 무리한 징세를 감행, 민생을 파탄에 빠트렸다.
천주교 신자인 강봉헌은 당시 "원주민 천주교도에겐 세금을 면제해주겠다"고 하며 제주의 천주교도들을 세금징수에 이용했다.
결국 이들의 횡포가 극심해 주민들을 격분하게 했다. ◇ 민란의 발생과 이재수의 등장
'교인 고인관이 봉세관(세금 징수관)의 명령이라 칭하고 어망세 25냥을 받아 갔다.
'
'교인 강기봉이 교인을 빙자해 동족인 여인을 강간하고 아이를 낳게 하는 등 사악한 폐습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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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금의 큰 비용을 들여 오조리에 서낭당을 지었는데 교인 이기선이 여러 교도를 풀어 거리낌 없이 방화하고 나무를 베어 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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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 관하 제주·정의·대정 3군의 교폐 사실을 조사해 묶은 보고서인 '삼군교폐사실성책'(三郡敎弊査實成冊)을 보면 당시 '교폐'와 '세폐'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폐단이 누적되자 1901년 5월 초 대정지역 사람들은 '상무사'라는 조직을 만들어 민회(民會)를 개최했다.
이들은 지역의 향장(鄕長)인 오대현을 장두로 내세우고, 세폐의 시정을 요구하는 건의문을 제주목사에게 제출하기 위해 동진과 서진으로 나누어 제주읍성을 향해 출발했다.
천주교 측은 민란이 일어났다고 보고 무장을 하고, 민회를 습격해 장두인 오대현을 비롯한 6명을 체포해갔다. 이때 장두 오대현을 대신해 등장한 사람이 바로 관노 출신인 이재수였다.
관노 출신이 장두가 된 것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없었던 일로, 민란 지도부의 계급적 성격이 바뀐 것이다.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은 5월 16일 제주성 외곽 황사평에 집결하고 성을 포위했다.
제주목사와 봉세관 강봉헌은 일찌감치 제주를 떠나 피신했고, 제주군수는 나중에 도망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민군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대포를 설치한 천주교민과 지루한 공방전을 계속 벌였다.
팽팽하던 균형은 성내 사람들이 민군에 호응해 성문을 열면서 깨졌다.
천주교에서 천대하고 이단으로 내몰았던 기생과 무녀들이 앞장서서 성문을 연 것이다.
제주성에 입성한 이재수는 관덕정 광장에서 천주교민을 직접 처형했다.
하지만 6월이 되자 프랑스 군함이 들이닥쳤다.
대한제국의 군대도 파견됐다.
결국 이재수를 비롯한 민군 지도부는 체포됐고 백성들은 흩어졌다.
이재수 등은 서울로 압송돼 근대식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했다.
이재수는 재판 중 최후 진술에서 "내가 죽인 것은 '역적'이지 '양민'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고 한다. ◇ 화해, 그리고 화합과 상생의 길
1901년 20세기 벽두부터 조선이라는 세계의 변방이자 조선 안에서도 최후 변방인 제주에서 벌어진 이재수의 난.
이 민란은 외래문화와 토착문화, 외세와 대한제국, 국가와 지방 사이의 충돌로 빚어진 총체적 사건이다.
제주도민과 연구자 등은 이 민란을 '반제국, 반침략적 민중항쟁', '기존 향촌 질서를 어지럽힌 부당한 간섭에 대한 저항', '중앙정부의 차별과 소외에 대한 저항'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한편, 천주교 측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받은 '신축교난'(辛丑敎難) 또는 '신축교안'(辛丑敎案)으로 봤다.
이러한 입장 차이로 생긴 갈등의 골은 깊었다.
1961년에 민란의 세 장두 이재수·오대현·강우백을 기려 건립된 '제주대정군삼의사비'가 원래 있었던 대정 홍살문 거리에서 이리저리 옮겨지다 결국 땅속에 묻혔고, 1997년에는 대정청년회가 비를 새로 건립했다.
그 과정에서 천주교와 많은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대화를 통해 화해로 이어지게 된다.
지난 1999년 천주교 제주선교 100주년 맞아 천주교 제주교구는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과거 교회사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정리하는 시도를 벌였다. 이어 2001년 이재수의 난 100주년을 맞아 태동한 기념사업회는 민란을 '제주항쟁'이라 명명하며, 로마교황과 한국천주교회, 프랑스 정부에 대해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이재수의 난 역사적 진실규명 등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채택해 발송하기도 했다.
결국, 지난 2003년 11월 천주교 제주교구와 제주도민을 대표한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는 '신축년 제주항쟁 102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을 채택했다.
양측은 선언문을 통해 '상호 존중의 기조 위에 과거사의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힐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제주 공동체의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노력한다'고 다짐했다.
천주교 제주교구 제5대 교구장이 된 문창우 비오 주교는 지난달 13일 주교 착좌식을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내년이면 이재수의 난 120주년을 맞는다.
1901년 제주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가 충돌했던 사건으로 그간 여러 심포지엄을 통해 2003년에는 화해 선언문을 나눴다"고 말했다.
문 주교는 "그러한 여정과 연결해 내년에는 심포지엄만이 아니라 관덕정과 황사평, 하논본당 등 과거 아픔이 있었던 곳에서 기념비 제막 등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황사평은 신축교안 때 민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보상적인 차원에서 땅을 받아 그곳에 천주교 교인들의 묫자리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문 주교는 "천주교인으로서 제주도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고 서로 추모하는 것이다. 황사평에 '화해의 탑 성당' 조성으로 제주도민과 천주교인들의 충돌을 기억하고 추모하면서 제주도민들의 아픔과 역사를 잊지 않고, 늘 변화하고 쇄신해나가는 공동체가 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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