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여성 보호' 이스탄불협약 탈퇴…거리 뒤덮은 보랏빛 물결

'가정폭력 근절' 2014년 발효, 일방 철회…"에르도안 퇴진하라" 항의 시위
독일·프랑스 등 국제사회도 반발 후폭풍…"터키의 진짜 얼굴, 인권 퇴보"
터키 정부가 여성을 가정폭력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내용을 담은 '이스탄불 협약'에서 탈퇴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대내외적으로 반발이 확산하는 등 후폭풍에 직면했다. 20일(현지시간) AP·AFP·로이터 통신에 등 따르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이스탄불 협약에서 탈퇴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남녀평등을 앞세운 이스탄불 협약은 가정 등에서의 성차별적 폭력 근절 의무 강화, 부부강간 및 여성 인권 침해의 상징으로 여겨온 여성 할례 처벌, 피해자 보호 등을 명시하고 있다.

이 협약은 2011년 45개 국가와 유럽연합(EU)의 서명을 끌어낸 뒤 2014년 발효됐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이슬람주의에 바탕을 둔 에르도안 대통령 주도의 보수성향 집권당 내부에서 이 협약이 "이혼을 부추기고 전통적인 가족 단위를 해체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이날 터키의 협약 탈퇴로 이어졌다.
현지 인권단체에 따르면 이스탄불 협약 탈퇴를 선언한 국가는 터키가 처음이다.

이에 터키 수도 앙카라와 이스탄불, 이즈미르 등 전국 곳곳에서 여성 수천 명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이들은 "결정을 철회하고 협약을 비준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여성 권익 신장 운동을 상징하는 보라색 깃발을 들고 에르도안 대통령의 퇴진도 요구했다.

한 여성 시위 참가자는 AP에 "우리는 이스탄불 협약이 시행되고 여성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매일 싸웠다"면서 "더는 여성 한 명의 죽음도 참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터키에서는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하는 '페미사이드'(여성살해)와 가정폭력이 심각한 수준이다.

현지 인권단체에 따르면 지난해엔 여성 약 409명이 살해됐으며, 올해 들어서도 이미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달 초에는 한 남성이 길거리에서 전 아내를 폭행하는 장면이 온라인에서 퍼지며 논란이 된 끝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폭력 근절 관련 입법을 직접 예고하기도 했다.

에르도안의 반대파 중 하나인 에크렘 이마모울루 이스탄불 시장은 트위터에서 이번 결정을 두고 "여성들이 수년간 대가를 치르며 쌓아온 노력을 짓뭉갠 처사"라고 성토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딸이 부회장을 맡은 친(親)정부 성향 단체 '여성과 민주주의 협회'(KADEM) 조차도 이스탄불 협약이 "폭력에 맞선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하며 탈퇴 결정에 유감을 표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 없이 탈퇴 결정을 내린 만큼, 탈퇴 자체가 무효이며 협약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비판이 쇄도하자 술레이만 소울루 내무부 장관은 "당국과 보안 병력은 가정폭력 등 여성에 대한 폭력과 계속 싸울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럽 등 국제사회도 비판에 가세했다.

독일 외교부는 성명을 통해 "터키의 모든 여성과 유럽에 잘못된 신호를 보냈다"고 했고, 프랑스 외교부도 깊은 유감이라면서 "이는 터키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터키 여성들에 연대를 표한다"고 밝혔다.

인권수호를 위한 국제기구인 유럽평의회의 마리자 페이치노비치 부리치 사무총장은 "이 협약은 매일 마주하는 폭력으로부터 여성을 지키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있어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진다"면서 "터키의 이번 결정은 이런 노력을 크게 퇴보시키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유럽의회의 나초 산체스 아모르 터키 보고관은 트윗을 통해 "이것이 터키 정부의 진짜 얼굴"이라면서 "법을 완전히 외면하고 인권을 퇴보시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