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진산, 주흘산 有感

버스 안에서 졸다 깨어 보니 ‘치악휴게소’다.

치악휴게소라면 중앙고속도로로 진입했단 얘긴데…오늘의 산행지는 분명 ‘문경 주흘산’이다.

그렇다면 여주휴게소 지나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바꿔 타야 맞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건 탑승 산객,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래, 그럴수 있겠다. 자고나면 없던 길도 생겨난다.

내가 모르는 또다른 길을 버스기사는 알고 있을 게다.전국 도로를 쫙 꿰고 있는, 명색이 대한민국 관광버스기사인데~”



믿었다. 제천IC에서 빠져나가면 샛길이 있을 줄로…그러나 버스는 제천IC도 무심히 지나쳤다. 어라? 또 이건 아닌데…

앞줄에 앉은 일행 몇몇이 그제서야 수런거린다.

룸밀러에 비친 운전기사의 표정도 당황해 하는 기색이다.



버스는 북단양I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내려섰다.

5번 국도로 들어 선 버스는 단양시멘트공장, 단양역, 단성역을 거쳐

단양IC 인근에서 좌회전해 927번 지방도로로 들어섰다.



“기사님! 많이 당황하셨쎄요?”가 딱 맞다. 또한번 판단 미스다.

이럴거면 북단양IC가 아닌 단양IC로 내려섰어야 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인 문경새재를 검색해 봤다.

남은 거리는 78km, 현재 시간은 10시 30분, 여기서부터 상선암, 도락산 지나 여우목고개 넘어 구비구비 산길이다.

족히 1시간은 걸릴 것이다. 이래저래 금쪽같은 시간을 길바닥에 깔았다.

계획한 산행 코스를 주어진 시간 내 다 걷기엔 무리다.

까짓거, 코스를 조금 줄이면 될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버스는 문경새재 주차장에 멈춰섰다.

배꼽 아래로 두 손 모아 잡은 버스기사께서 헤맨 죄?를 赦해 달라며 함박 미소 지으니 모두들 넉넉한 웃음으로 맞받는다.



문경의 鎭山인 주흘산은 영남대로를 사이에 두고 조령산과 맞보고 있다.

영남대로는 서울서 부산 동래부를 잇는 조선시대 간선로 중 하나로 左道, 中道, 右道의 세가지 길이 있었다.

‘좌도’는 ‘열닷새 길’로 죽령을, ‘중도’는 ‘열나흘 길’로 조령을, ‘우도’는 ‘열엿새 길’로 추풍령을 넘는 길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 대부분은 左道와 右道를 피해 경사스런 소식을 듣게 된다는 ‘聞慶’의 조령, 즉 中道를 택했다.

죽령은 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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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을 벗어나 조령1관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난 표시석,

‘문경새재 과거 길’이 그래서 더욱 의미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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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관문을 지나자, 여궁폭포, 혜국사, 대궐터, 주흘산 주봉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큼지막한 이정표가 산객들을 오른쪽 방향으로 안내했다.



바람결을 타고 색서폰소리가 들려 온다. 감미로우나 멜랑꼴리하다.

‘칠갑산’이다. 나도 모르게 따라 흥얼거린다. 소리의 진원지는

여궁폭포 300m 前 왼쪽 산비탈에 덩그러니 자리한 ‘여궁휴게소’다.

하산 길에 들러 확인한 바, 색서폰 연주는 꽁지머리 주인장의 솜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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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여궁휴게소에서 길은 두갈래로 갈라진다.

곧장 직진하면 여궁폭포에 들렀다가 살짝 돌아 오르는 길이고,

왼쪽 비탈로 올라서면 여궁폭포의 절경을 놓치게 되는 길이다.

고작 300m를 질러 가겠다고 ‘여궁폭’을 포기할 산객은 없을 듯.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협곡으로 들어서니 이내 바위벼랑이 막아선다.

하얀 물줄기가 바위벼랑 사이로 수줍게 흘러내린다.

바로 여궁폭포다.
칠선녀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몸을 씻고 올라 갔다는 곳,

폭포의 형상이 마치 여인의 아랫도리를 닮았다 하여

여심폭포라고도 한다.(들머리 등산 안내판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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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를 끼고 너덜길을 돌아 오르면 여궁휴게소에서 갈라진

지름길과 만난다. 폭포 정수리에서 혜국사까지는 계곡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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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국사가 보이는 갈림길에서 계곡을 버리고 오른쪽 비탈길로 올라붙었다.

주흘산 주봉을 2.5km 남겨 놓은 지점이다.



혜국사는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이 고찰은 신라 문성왕 8년(846)에 체징 보조국사가 창건했다.

창건 시 ‘범흥사’라 이름 하였으나 고려말 홍건적이 쳐들어 왔을때

공민왕이 난을 피해 머문 뒤로 國恩을 입은 절이라 하여 惠國寺로 개칭했다.

지금은 비구니의 수도 도량으로 이름 높다.



아쉽게도 고찰의 흔적은 둘러보지 못한 채 힐끗 지붕만 건너다 보고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엉뚱한 곳으로 돌고 돌아 온 버스 때문이다.



혜국사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대궐샘에 이르는 1.3km 구간은

너덜길이긴 하나 대체로 편안하다.

다만 돌뿌리 사이나 낙엽 아래 결빙이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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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850m, 대궐터 대궐샘에 이르자, 군데군데 잔설이 희끗하다.

들머리에서의 노곤한 봄날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대궐샘의 물맛은 차고 깊었다.

지엄하신 임금님께서 드셨을 샘물이니 어련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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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궐샘에서 능선까지는 지리한 계단 구간이다.

신발코에 코를 박고 가쁜 숨 몰아쉬며 쉼없이 오른다.

끝이 보이는가 싶으면 다시 또 계단은 이어지고,,,

그렇게 900개가 넘는 계단에 올라서니 다시 겨울이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파란 하늘은 차디 차고, 잔가지에 높이 매달린 겨우살이는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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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래 봄소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비탈은 여전히 설원이다.

봄의 낌새를 느끼기엔 여러 날이 걸릴 듯, 기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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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관문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지나자, 쩍 갈라선 듯한

암벽 사이로 문경 일대가 빠꼼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봉 턱밑은 얼어붙어 발을 내딛기가 쉽지않다.

오르는 동안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았다.

내려설 땐 필히 해야겠다 맘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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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주흘산 주봉(1,075m)에 올라섰다.

주변 산군이 호위하듯 키를 낮춰 주봉을 향한 모습이 장관이다.

그래서일까, 주흘산은 한껏 기세등등, 위풍당당해 보인다.

북쪽으로 주흘산 영봉이 빤히 보인다. 1㎞ 거리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돌아서야만 한다.

주어진 시간이 널널하지 않다. 빠듯하다.

서울을 떠나올때만 해도 주흘산 주봉에 올라~영봉~꽃밭서들~제2관문~광개토대왕 세트장~제1관문으로 한바퀴를 돌아내려오는 것이었다.

신록 우거진 어느날 다시찾아 오늘 못다한 아쉬움을 털어내기로 하고 왔던 길 다시 되돌아 원점으로 내려 설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