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5·18] ③ "끝까지 힘 보태겠다" 광주 미얀마인 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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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주말 광주 유스퀘어 광장에서 외치는 미얀마의 민주화 "미얀마 밖에서도 함께 싸우고 있는 동포들이 있으니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미얀마 군사 쿠데타에 대한 미얀마인들의 저항 운동은 이역만리 광주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광주에 거주하는 미얀마인들이 모인 '광주 미얀마 네트워크'가 구심점 역할을 한다.
이 단체를 이끌고 있는 미얀마인 묘네자(MYO NAY ZAR·38) 씨를 지난 6일 광주 광산구에 있는 그의 작은 사업장에서 만났다. 마스크를 쓴 얼굴에 선한 눈매가 인상적인 묘네자 씨는 2006년 취업 비자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가 한국인 아내를 만나 아이를 낳고 광주에 정착했다.
지난 2월 1일 군부의 쿠데타 소식과 함께 현지에 있는 친구들과 지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미얀마 소식은 처참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묘네자 씨의 주변인들이 변을 당하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군부의 강경 진압에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쳐 실려 가고 있었다. 쿠데타 이후 지난 5일까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사람만 769명, 부상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묘네자 씨는 "살기 위해서 노선을 바꾸고 있다"며 비폭력 평화시위가 무장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최근의 현지 소식을 전했다. 도망치듯 외곽 지역으로 물러난 젊은이들이 사냥용 총으로 무장하고 게릴라전을 벌이는가 하면 남동부 카렌민족연합(KNU) 등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내전으로 접어들었다며 묘네자 씨는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걸 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는 고향의 친구들을 위해 머나먼 타국에서 묘네자 씨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상황을 널리 알리고 한국인들의 관심과 도움을 청하는 것뿐.
그는 쿠데타 발생 5일째 되는 날부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유스퀘어 광장 앞에서 손팻말을 들기 시작했다.
미얀마에서도 해보지 않은 생애 첫 시위였다.
1인 시위로 시작했지만 금세 뜻을 함께하는 광주 거주 미얀마인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언젠가 귀국해야 하는 유학생들도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서 여기에 참여했다.
이런 식으로 광주 미얀마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2월 8일부터 지금까지 매주 주말마다 유스퀘어 광장에 모여 쿠데타를 규탄하고 민주 정부 구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이 가장 바라는 건 정당성 없는 군사 정부 대신 민주 진영의 국민(민족)통합정부(NUG)를 국제사회가 인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군부를 몰아내는 것.
이들이 집회에서 들고 있는 큼지막한 NUG 손팻말은 그러한 바람을 담고 있다. 집회 초창기 땐 한국의 관련 법·제도를 잘 알지 못해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집회하려면 방역 물품을 구비해 놓는 것은 필수였지만, 누구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집회를 열지 못 할 뻔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함께 있었던 광주 시민단체 관계자가 급히 방역 물품을 마련해 와 집회는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부담이 될 만큼 집회에 필요한 비용도 만만치 않다.
미얀마 단체를 돕겠다며 여기저기 후원금을 냈다는 소식만 들려올 뿐, 정작 이 단체는 지금까지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묘네자 씨는 끝까지 민주화를 위해 힘을 보태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외국에서도 이렇게나마 마음을 함께하고 도와주고 있다는 걸 (자국민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며 "우리의 노력이 조금이나마 현지에서 힘겹게 싸우는 친구들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들끼리 집회할 땐 주목받지 못하다가 5·18 관련 단체 등에서 언론 보도가 될 수 있도록 해줬다"며 "그 덕분에 우리의 목소리가 전국에 전해질 수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당사자인 우리의 역할은 줄어들고, 한국인 단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다니는 듯한 느낌이 있다"며 "우리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또 광주에서 모은 지원금을 미얀마 현지로 보내는 절차가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목마를 때 조금이라도 물을 주는 게 중요하다. 다 끝나고선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연합뉴스
미얀마 군사 쿠데타에 대한 미얀마인들의 저항 운동은 이역만리 광주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광주에 거주하는 미얀마인들이 모인 '광주 미얀마 네트워크'가 구심점 역할을 한다.
이 단체를 이끌고 있는 미얀마인 묘네자(MYO NAY ZAR·38) 씨를 지난 6일 광주 광산구에 있는 그의 작은 사업장에서 만났다. 마스크를 쓴 얼굴에 선한 눈매가 인상적인 묘네자 씨는 2006년 취업 비자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가 한국인 아내를 만나 아이를 낳고 광주에 정착했다.
지난 2월 1일 군부의 쿠데타 소식과 함께 현지에 있는 친구들과 지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미얀마 소식은 처참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묘네자 씨의 주변인들이 변을 당하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군부의 강경 진압에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쳐 실려 가고 있었다. 쿠데타 이후 지난 5일까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사람만 769명, 부상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묘네자 씨는 "살기 위해서 노선을 바꾸고 있다"며 비폭력 평화시위가 무장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최근의 현지 소식을 전했다. 도망치듯 외곽 지역으로 물러난 젊은이들이 사냥용 총으로 무장하고 게릴라전을 벌이는가 하면 남동부 카렌민족연합(KNU) 등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내전으로 접어들었다며 묘네자 씨는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걸 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는 고향의 친구들을 위해 머나먼 타국에서 묘네자 씨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상황을 널리 알리고 한국인들의 관심과 도움을 청하는 것뿐.
그는 쿠데타 발생 5일째 되는 날부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유스퀘어 광장 앞에서 손팻말을 들기 시작했다.
미얀마에서도 해보지 않은 생애 첫 시위였다.
1인 시위로 시작했지만 금세 뜻을 함께하는 광주 거주 미얀마인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언젠가 귀국해야 하는 유학생들도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서 여기에 참여했다.
이런 식으로 광주 미얀마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2월 8일부터 지금까지 매주 주말마다 유스퀘어 광장에 모여 쿠데타를 규탄하고 민주 정부 구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이 가장 바라는 건 정당성 없는 군사 정부 대신 민주 진영의 국민(민족)통합정부(NUG)를 국제사회가 인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군부를 몰아내는 것.
이들이 집회에서 들고 있는 큼지막한 NUG 손팻말은 그러한 바람을 담고 있다. 집회 초창기 땐 한국의 관련 법·제도를 잘 알지 못해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집회하려면 방역 물품을 구비해 놓는 것은 필수였지만, 누구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집회를 열지 못 할 뻔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함께 있었던 광주 시민단체 관계자가 급히 방역 물품을 마련해 와 집회는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부담이 될 만큼 집회에 필요한 비용도 만만치 않다.
미얀마 단체를 돕겠다며 여기저기 후원금을 냈다는 소식만 들려올 뿐, 정작 이 단체는 지금까지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묘네자 씨는 끝까지 민주화를 위해 힘을 보태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외국에서도 이렇게나마 마음을 함께하고 도와주고 있다는 걸 (자국민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며 "우리의 노력이 조금이나마 현지에서 힘겹게 싸우는 친구들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들끼리 집회할 땐 주목받지 못하다가 5·18 관련 단체 등에서 언론 보도가 될 수 있도록 해줬다"며 "그 덕분에 우리의 목소리가 전국에 전해질 수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당사자인 우리의 역할은 줄어들고, 한국인 단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다니는 듯한 느낌이 있다"며 "우리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또 광주에서 모은 지원금을 미얀마 현지로 보내는 절차가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목마를 때 조금이라도 물을 주는 게 중요하다. 다 끝나고선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