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라비다] 아르헨 빈민촌에 희망 심는 '넝마주이 수녀' 이세실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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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동안 빈민촌서 생활하며 '넝마주이 협동조합' 조직
"'고생' 아닌 '행복' 택한 삶…주민들 변화 속에 희망 봅니다" [※ 편집자 주 : '비바라비다'(Viva la Vida)는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의 스페인어로, 중남미에 거주하는 한인, 한국과 인연이 있는 이들을 포함해 지구 반대편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특파원 연재 코너입니다. ]
남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차로 30분쯤 떨어진 킬메스에 '비야 이타티'(Villa Itati)라는 이름의 빈민촌이 있다.
전기와 수도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현지인들도 출입을 꺼리는 이 가난하고 복잡한 동네에서 한인 수녀 한 명이 주민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 2000년 이곳에 온 이세실리아(65) 수녀다.
30일(현지시간) 전화로 만난 이 수녀는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 또는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해서 이곳에 사는 것이 아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힘줘 말했다. 이 수녀는 서울서 태어난 후 1976년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건너왔다.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그는 1978년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에 입회하며 종교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양성 교육을 마친 뒤 아르헨티나 남단 파타고니아의 외딴 원주민 공동체 등에서 20년 가까이 보냈고 2000년 비야 이타티로 와서 다른 수녀들과 함께 살고 있다.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땐 험악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60∼70년대 판자촌 같았죠. 남쪽 지방 사람들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환경에서 존엄성을 지키며 살았는데, 이곳 아이들은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였고 젊은 사람들 간의 싸움이나 총격전도 일어났죠."
도착 직후 수녀는 매일같이 마을을 돌아보며 주민들을 만났다.
가톨릭 국가 아르헨티나의 주민들은 다행히도 지구 반대편 나라 출신의 수녀에게 호의적이었다.
당시 주민들 상당수는 폐지와 고물을 주워 팔아 그날그날 식량을 마련하는 처지였다.
그 무렵 아르헨티나는 최악의 경제위기로 향해가는 중이었고 고물상들이 잇따라 문을 닫자 넝마주이 주민들의 생계도 막막해졌다.
이 수녀는 주민들과 매주 성당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논의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비야 이타티 넝마주이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은 주민들이 주워온 폐지나 유리, 플라스틱 등을 사들인 후 재활용할 수 있게 가공해서 판다.
거리에서 폐지 등을 주워오는 사람들과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100∼110가구가량이 조합의 일원이다.
단순히 일자리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은 삶과 기회"를 만든다는 것이 협동조합의 목적이었기에 공부방을 운영해 학생들의 학업도 돕는다.
놀이방에서 아이들도 돌보고 끼니 해결이 쉽지 않은 주민들에게 음식도 제공한다. 삭막한 빈민촌에 희망을 심고 빈민들의 자활을 돕는 이 수녀의 활동은 이미 아르헨티나 언론에서 여러 차례 소개됐다.
현지 언론은 그를 '빈민촌 수녀', '넝마주이 수녀'라고 부른다.
결코 순탄치 않은 20여 년이었다.
빈민촌이 곧 우범지대인 경우가 많은 중남미였기에 이 수녀의 활동에 불만을 가진 이들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했다.
2016년 말엔 화재로 협동조합 시설이 다 타버리는 큰 위기를 맞았다.
"불이 나서 90%가 다 타고 벽만 남았어요.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렇지만 조합원들은 곧 충격을 딛고 다시 시작하자고 했어요.
한번 시작했으니 두 번도 시작할 수 있다면서요.
"
가시밭길을 마다치 않는 이 수녀를 보며 다른 이들은 '왜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묻기도 하지만 그는 "고생스러운 삶을 택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택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가난한 이들 안에서 살아있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깨달음과 기쁨을 얻는다고 했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딸이 수녀원에 들어간 후 몇 달을 앓았고, 수녀가 된 이후에도 왜 더 편안한 삶을 살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으나 행복해하는 딸을 보면서 결국은 딸이 택한 삶을 이해했다. 크고작은 위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가난한 비야 이타티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이 수녀도 지난 4월 코로나19를 앓았다.
다행히 증상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조금씩 숨이 찬 증상은 남았다.
감염된 조합원이 늘어나고 아르헨티나의 코로나19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협동조합도 지난주 잠시 문을 닫아야 했다.
코로나19 실직자가 늘어나며 식량 지원에 의존하는 이들도 늘어났는데 최근 가파른 물가 상승으로 어려움이 더해졌다.
앞으로도 어려움은 계속되겠지만 지난 20년간 주민들의 변화를 목격한 수녀는 늘 희망을 잃지 않는다.
"수레를 끌고 종이를 줍던 7살 꼬마가 이젠 20대 청년이 돼서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협동조합 초반부터 함께 했던 조합장의 큰딸은 의대 졸업반이 됐죠.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선을 추구하고 삶을 추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잠시 어긋날 수도 있지만 공동체 차원에서 서로 나누고 도우면 결국은 선을 택하게 됩니다.
"
기회가 주어지면 변화가 온다는 것을 정치인이나 부자들이 더 많이 알게 됐으면 좋겠다는 이 수녀는 우루과이 소설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남긴 말을 인용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강조했다.
"많은 작은 사람들이, 작은 장소에서, 작은 일을 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연합뉴스
"'고생' 아닌 '행복' 택한 삶…주민들 변화 속에 희망 봅니다" [※ 편집자 주 : '비바라비다'(Viva la Vida)는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의 스페인어로, 중남미에 거주하는 한인, 한국과 인연이 있는 이들을 포함해 지구 반대편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특파원 연재 코너입니다. ]
남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차로 30분쯤 떨어진 킬메스에 '비야 이타티'(Villa Itati)라는 이름의 빈민촌이 있다.
전기와 수도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현지인들도 출입을 꺼리는 이 가난하고 복잡한 동네에서 한인 수녀 한 명이 주민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 2000년 이곳에 온 이세실리아(65) 수녀다.
30일(현지시간) 전화로 만난 이 수녀는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 또는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해서 이곳에 사는 것이 아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힘줘 말했다. 이 수녀는 서울서 태어난 후 1976년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건너왔다.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그는 1978년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에 입회하며 종교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양성 교육을 마친 뒤 아르헨티나 남단 파타고니아의 외딴 원주민 공동체 등에서 20년 가까이 보냈고 2000년 비야 이타티로 와서 다른 수녀들과 함께 살고 있다.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땐 험악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60∼70년대 판자촌 같았죠. 남쪽 지방 사람들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환경에서 존엄성을 지키며 살았는데, 이곳 아이들은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였고 젊은 사람들 간의 싸움이나 총격전도 일어났죠."
도착 직후 수녀는 매일같이 마을을 돌아보며 주민들을 만났다.
가톨릭 국가 아르헨티나의 주민들은 다행히도 지구 반대편 나라 출신의 수녀에게 호의적이었다.
당시 주민들 상당수는 폐지와 고물을 주워 팔아 그날그날 식량을 마련하는 처지였다.
그 무렵 아르헨티나는 최악의 경제위기로 향해가는 중이었고 고물상들이 잇따라 문을 닫자 넝마주이 주민들의 생계도 막막해졌다.
이 수녀는 주민들과 매주 성당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논의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비야 이타티 넝마주이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은 주민들이 주워온 폐지나 유리, 플라스틱 등을 사들인 후 재활용할 수 있게 가공해서 판다.
거리에서 폐지 등을 주워오는 사람들과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100∼110가구가량이 조합의 일원이다.
단순히 일자리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은 삶과 기회"를 만든다는 것이 협동조합의 목적이었기에 공부방을 운영해 학생들의 학업도 돕는다.
놀이방에서 아이들도 돌보고 끼니 해결이 쉽지 않은 주민들에게 음식도 제공한다. 삭막한 빈민촌에 희망을 심고 빈민들의 자활을 돕는 이 수녀의 활동은 이미 아르헨티나 언론에서 여러 차례 소개됐다.
현지 언론은 그를 '빈민촌 수녀', '넝마주이 수녀'라고 부른다.
결코 순탄치 않은 20여 년이었다.
빈민촌이 곧 우범지대인 경우가 많은 중남미였기에 이 수녀의 활동에 불만을 가진 이들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했다.
2016년 말엔 화재로 협동조합 시설이 다 타버리는 큰 위기를 맞았다.
"불이 나서 90%가 다 타고 벽만 남았어요.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렇지만 조합원들은 곧 충격을 딛고 다시 시작하자고 했어요.
한번 시작했으니 두 번도 시작할 수 있다면서요.
"
가시밭길을 마다치 않는 이 수녀를 보며 다른 이들은 '왜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묻기도 하지만 그는 "고생스러운 삶을 택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택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가난한 이들 안에서 살아있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깨달음과 기쁨을 얻는다고 했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딸이 수녀원에 들어간 후 몇 달을 앓았고, 수녀가 된 이후에도 왜 더 편안한 삶을 살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으나 행복해하는 딸을 보면서 결국은 딸이 택한 삶을 이해했다. 크고작은 위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가난한 비야 이타티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이 수녀도 지난 4월 코로나19를 앓았다.
다행히 증상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조금씩 숨이 찬 증상은 남았다.
감염된 조합원이 늘어나고 아르헨티나의 코로나19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협동조합도 지난주 잠시 문을 닫아야 했다.
코로나19 실직자가 늘어나며 식량 지원에 의존하는 이들도 늘어났는데 최근 가파른 물가 상승으로 어려움이 더해졌다.
앞으로도 어려움은 계속되겠지만 지난 20년간 주민들의 변화를 목격한 수녀는 늘 희망을 잃지 않는다.
"수레를 끌고 종이를 줍던 7살 꼬마가 이젠 20대 청년이 돼서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협동조합 초반부터 함께 했던 조합장의 큰딸은 의대 졸업반이 됐죠.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선을 추구하고 삶을 추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잠시 어긋날 수도 있지만 공동체 차원에서 서로 나누고 도우면 결국은 선을 택하게 됩니다.
"
기회가 주어지면 변화가 온다는 것을 정치인이나 부자들이 더 많이 알게 됐으면 좋겠다는 이 수녀는 우루과이 소설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남긴 말을 인용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강조했다.
"많은 작은 사람들이, 작은 장소에서, 작은 일을 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