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9000억 들여 1000억 효과 낸 소부장 정책

일본 의존도 낮췄다고 하지만
소부장 키우려면 시장 크게 봐야

이수빈 산업부 기자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밝힌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육성 사업의 성과를 언급했다. 2019년 시작된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소부장 산업을 지원, 대일 의존도를 크게 낮췄다는 것이 골자다. 정부도 지난달 소부장 성과 보고 대회를 열고 “소부장 자립을 이뤄냈다”고 자찬했다.

정부가 밝힌 숫자만으로 이 같은 평가를 내리는 것은 성급해 보인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2년간 9241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327억원의 직·간접 매출과 726억원의 투자를 창출했다. 소부장 육성 사업의 경제적 성과가 투자액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얘기다. 실제 매출로 이어진 액수가 얼마인지, 어떤 분야에서 성과를 냈는지 등은 아예 공개하지 않았다. 언제쯤 ‘돈’이 될지 의문스러운 논문이나 특허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 이유다.정부 소부장 산업 육성 사업의 궁극적인 목표가 ‘국산화’라는 점도 우려스럽다. 국산 소재와 부품을 사용해 중간재를 만드는 것과 이를 글로벌 시장에 판매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제조업계는 긴밀한 협력관계로 돌아간다. 비슷한 수준의 기술이어도 신뢰관계가 쌓이지 않은 회사 제품은 아예 쓰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문제가 터지면 밸류체인 전체가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갑과 같은 을’로 평가받는 네덜란드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업체 ASML의 180개 협력사 중 한국 업체는 단 한 곳도 없다. 일본이 미쓰이케미칼, 교세라 등을 보유한 것과 대조적이다. 삼성전자와 TSMC가 2년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ASML도 일본 업체의 도움 없이는 장비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미래 반도체 경쟁력을 좌우하는 패키징 분야도 마찬가지다. 관련 업계에선 반도체 패키징 장비의 80% 이상을 일본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일 간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들 업체가 한국산 부품과 소재를 인정해줄 리 만무하다. 일본뿐 아니다. 제조업 밸류체인에 있는 그 어느 국가와도 사이가 틀어지면 손실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외교 마찰을 최소화하고 다른 국가들과의 협업 체계에 신속히 합류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자국 기업으로 구성한 밸류체인 ‘주식회사 일본’을 주장하던 일본도 최근 주요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틀었다. “우리 물건의 품질이 이렇게 뛰어나다”는 자화자찬만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소부장 기업 관계자들의 주장이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