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등단 20년만에 첫 소설 신용목…"사랑 없으면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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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재' 출간…"행동 아니라 마음을 중심에 두고 쓴 서사" 지난해 겨울, 출판사 난다 대표인 김민정 시인이 신용목(47) 시인에게 연락해 이렇게 물었다. 컬러(색깔)와 관련된 책 시리즈를 내고 싶은데 시인에겐 어떤 색이 있느냐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이 없다고 여긴 신용목은 어떤 순간을 얘기할 순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저녁 무렵 해가 사라진 공간에 빛의 알갱이가 떠다니는 묘한 순간이 있어요.
남아있는 건 아닌데,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은 것 같은…. 밝은 빛도 어둠도 아닌, 오늘도 내일도 아닌, 삶도 죽음도 아닌 뿌연 순간을 그레이나 잿빛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여기서 출발한 이야기가 그의 첫 소설 '재'(난다)로 출간됐다.
책 표지엔 귀퉁이가 찢긴 진회색 방수포 질감을 이미지로 넣었다.
신용목은 최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타고 남은 재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라며 "있고 없음, 빛과 어둠, 삶과 죽음에 관해 얘기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재'는 일인칭 화자 '나'가 15년 전 고교 시절 친구 '모'의 부고를 접하면서 시작된다.
'나'가 모와 그의 누나 '현' 남매를 떠올리는 과거, 아내 '수'와 보낸 현재가 교차하고, 두 축을 중심으로 '나'의 독백이 물 흐르듯 끼어든다.
사고사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는 모의 죽음, 빈소에서 과거 좋아했던 현과의 만남을 통해 '나'의 감정은 휘청거린다. "살아가다 문득 자신, 사랑, 삶, 죽음에 대해 알고 있던 것들이 통째로 흔들리는 순간이 있잖아요.
우린 보통 그걸 지워버리고 뒤로 물려버리는데, 모란 친구의 죽음이 나를 계속 흔들림 속에 두죠. 그때가 환기되면서 현에 대한 마음을 접고 산 시간이 어쩌면 허구였을지 모른단 걸 깨닫죠. 흔들린 상태에서 볼 수 있는 진실도 있으니까요.
"
신용목은 모와 현이 '나'란 사람 속에 숨어있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일깨우는 사람들이라면, 사회적인 문제의식이 있던 수는 인간 본질을 잃지 않도록 터치하는 마중물 같은 존재라고 덧붙였다. 소설은 망각했던 과거 흔적이 내적 소용돌이를 치지만 드라마틱하게 증폭하는 서사도, 시간을 따라 명료하게 이어진 선형적 구조도 아니다.
신용목은 "어떤 순간이 떠오르면 그것과 연관된 과거와 현재를 그다음에 배치하는 식으로 전개했다"며 "하나의 선을 깔아놓기보다 점을 모아가는 방식이었다.
시를 써서인지, 행동을 통한 서사적 구조보다 마음을 통한 서사적 흐름이 더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시어를 다루던 시인이 내면의 구석구석을 들추다 보니 손에 잡힐 듯 만져지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글 사이 마음을 찌르는 문장들은 사적이면서도 시적이다.
'모든 시간은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진다고 해서 애초부터 없어도 좋을 시간은 없다', '사랑에는 언제나 끝나고 말 운명과 그것이 남길 상처에 대한 각성이 미리 도착해 있다', '사랑이 불가능한 시간을 견디는 게 인생이라면 삶과 죽음은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공감의 표식으로 귀퉁이를 접어둔 페이지가 수두룩할 정도로 술술 읽히는데도 정작 작가에겐 쉽사리 풀리지 않는 대목도 있었다.
"내가 현이 혼자 있던 방문을 열었을 때, 빛 속에 빠진 듯한 느낌을 환한 유리 결정체, 환한 백자처럼 그리고 싶었죠.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말을 걸면 와장창 깨질 것 같은 순간처럼요.
지금도 다시 보며 머리를 쥐어뜯는 부분이죠."
끝내 한 줌의 재가 된 모의 심정을 알아가는 부분도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작가는 며칠간 방에 불을 꺼놓고 가만히 앉아있기도 했다.
그는 "'재'란 걸 시작할 때 떠올린 몇 가지 장면 중 하나"라며 "정말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때 남아있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사랑 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있어 우리가 죽음의 의미에도 접근할 수 있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신용목은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장했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나의 끝 거창' 등 여러 권의 시집을 내 내밀한 사유와 비범한 언어 감각을 인정받았다.
지난해 3월부터는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책 말미 '작가의 말'에는 '내가 가르치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에게 내가 더 많이 배운다는 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적었다.
그는 "학생들은 시 안에 어떤 순간을 툭 갖고 와서 자기 심장을 꺼내놓을 때가 있다"며 "내가 잃어버리고 지나온 순간을 돌려줄 때도 있고, 무너지게 할 때도 있다.
이런 말을 하면 학생들이 등록금 반환 요청을 할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시인 등단 20여 년 만에 낸 첫 소설, 그는 시와 소설을 쓸 때의 자의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다음 작품을 묻자 묘한 대답을 내놓았다.
"시가 순간 속으로 푹 찔러넣는 느낌이라면, 소설은 그 옆의 순간을 계속 바라보며 나아가죠. 시의 순간에 서린 것들을 불러오다 보면 제 안의 또 다른 나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순간을 쓰고 빈자리를 그들 이야기로 채우다 보면 소설이 되죠. 저도 몰랐는데 제가 한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하하."
/연합뉴스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이 없다고 여긴 신용목은 어떤 순간을 얘기할 순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저녁 무렵 해가 사라진 공간에 빛의 알갱이가 떠다니는 묘한 순간이 있어요.
남아있는 건 아닌데,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은 것 같은…. 밝은 빛도 어둠도 아닌, 오늘도 내일도 아닌, 삶도 죽음도 아닌 뿌연 순간을 그레이나 잿빛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여기서 출발한 이야기가 그의 첫 소설 '재'(난다)로 출간됐다.
책 표지엔 귀퉁이가 찢긴 진회색 방수포 질감을 이미지로 넣었다.
신용목은 최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타고 남은 재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라며 "있고 없음, 빛과 어둠, 삶과 죽음에 관해 얘기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재'는 일인칭 화자 '나'가 15년 전 고교 시절 친구 '모'의 부고를 접하면서 시작된다.
'나'가 모와 그의 누나 '현' 남매를 떠올리는 과거, 아내 '수'와 보낸 현재가 교차하고, 두 축을 중심으로 '나'의 독백이 물 흐르듯 끼어든다.
사고사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는 모의 죽음, 빈소에서 과거 좋아했던 현과의 만남을 통해 '나'의 감정은 휘청거린다. "살아가다 문득 자신, 사랑, 삶, 죽음에 대해 알고 있던 것들이 통째로 흔들리는 순간이 있잖아요.
우린 보통 그걸 지워버리고 뒤로 물려버리는데, 모란 친구의 죽음이 나를 계속 흔들림 속에 두죠. 그때가 환기되면서 현에 대한 마음을 접고 산 시간이 어쩌면 허구였을지 모른단 걸 깨닫죠. 흔들린 상태에서 볼 수 있는 진실도 있으니까요.
"
신용목은 모와 현이 '나'란 사람 속에 숨어있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일깨우는 사람들이라면, 사회적인 문제의식이 있던 수는 인간 본질을 잃지 않도록 터치하는 마중물 같은 존재라고 덧붙였다. 소설은 망각했던 과거 흔적이 내적 소용돌이를 치지만 드라마틱하게 증폭하는 서사도, 시간을 따라 명료하게 이어진 선형적 구조도 아니다.
신용목은 "어떤 순간이 떠오르면 그것과 연관된 과거와 현재를 그다음에 배치하는 식으로 전개했다"며 "하나의 선을 깔아놓기보다 점을 모아가는 방식이었다.
시를 써서인지, 행동을 통한 서사적 구조보다 마음을 통한 서사적 흐름이 더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시어를 다루던 시인이 내면의 구석구석을 들추다 보니 손에 잡힐 듯 만져지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글 사이 마음을 찌르는 문장들은 사적이면서도 시적이다.
'모든 시간은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진다고 해서 애초부터 없어도 좋을 시간은 없다', '사랑에는 언제나 끝나고 말 운명과 그것이 남길 상처에 대한 각성이 미리 도착해 있다', '사랑이 불가능한 시간을 견디는 게 인생이라면 삶과 죽음은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공감의 표식으로 귀퉁이를 접어둔 페이지가 수두룩할 정도로 술술 읽히는데도 정작 작가에겐 쉽사리 풀리지 않는 대목도 있었다.
"내가 현이 혼자 있던 방문을 열었을 때, 빛 속에 빠진 듯한 느낌을 환한 유리 결정체, 환한 백자처럼 그리고 싶었죠.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말을 걸면 와장창 깨질 것 같은 순간처럼요.
지금도 다시 보며 머리를 쥐어뜯는 부분이죠."
끝내 한 줌의 재가 된 모의 심정을 알아가는 부분도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작가는 며칠간 방에 불을 꺼놓고 가만히 앉아있기도 했다.
그는 "'재'란 걸 시작할 때 떠올린 몇 가지 장면 중 하나"라며 "정말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때 남아있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사랑 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있어 우리가 죽음의 의미에도 접근할 수 있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신용목은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장했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나의 끝 거창' 등 여러 권의 시집을 내 내밀한 사유와 비범한 언어 감각을 인정받았다.
지난해 3월부터는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책 말미 '작가의 말'에는 '내가 가르치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에게 내가 더 많이 배운다는 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적었다.
그는 "학생들은 시 안에 어떤 순간을 툭 갖고 와서 자기 심장을 꺼내놓을 때가 있다"며 "내가 잃어버리고 지나온 순간을 돌려줄 때도 있고, 무너지게 할 때도 있다.
이런 말을 하면 학생들이 등록금 반환 요청을 할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시인 등단 20여 년 만에 낸 첫 소설, 그는 시와 소설을 쓸 때의 자의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다음 작품을 묻자 묘한 대답을 내놓았다.
"시가 순간 속으로 푹 찔러넣는 느낌이라면, 소설은 그 옆의 순간을 계속 바라보며 나아가죠. 시의 순간에 서린 것들을 불러오다 보면 제 안의 또 다른 나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순간을 쓰고 빈자리를 그들 이야기로 채우다 보면 소설이 되죠. 저도 몰랐는데 제가 한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하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