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사업기회 이용' 첫 제재한 공정위…솜방망이 처벌 논란도(종합)

공정위 심사관·SK, 심판정서 570분 설전…소극적 제공행위 제재 첫 사례
선례 없어 검찰 고발 않기로…의무고발요청·주주대표소송 가능성도
공정거래위원회가 22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SK실트론 지분 인수와 관련해 최 회장과 SK에 과징금을 부과한 것은 '지배주주의 회사 사업 기회 이용' 행위를 제재한 첫 사례다. 3년간 조사를 통해 각종 증거를 수집한 공정위 사무처는 전원회의에서 SK와 9시간 넘는 설전을 벌인 끝에 제재 결정을 끌어냈다.

그러나 위법성이 인정됐지만 검찰 고발 조치가 빠지고 과징금도 16억원에 그쳐 '솜방망이 처벌' 논란도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 사업기회 제공 여부 두고 570분 공방
SK실트론 사건의 전원회의가 열린 지난 15일 공정위 세종 심판정. 휴식 시간을 제외한 약 9시간 30분 동안 공정위 심사관과 SK 대리인 측은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법리 공방을 벌였다. 핵심 쟁점은 '최 회장이 가져간 실트론 주식 29.4%의 취득 기회를 SK의 사업 기회로 볼 수 있느냐'였다.

공정거래법 23조의 2는 공시대상기업집단 소속 회사가 특수관계인에게 회사에 상당한 이익이 될 사업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SK 측은 사업 기회가 아닌 단순한 '재무적 투자 기회'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소수지분 투자로서 경영권과 무관하고, 이미 실트론 주식 70.6%를 확보한 상태에서 나머지를 인수할 경우 손실리스크도 존재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보다 앞서 KTB PE로부터 실트론 주식 19.6%를 인수하는 양해각서 체결 당시 다른 실트론 주식을 취득할 경우 거액의 위약금을 물도록 규정한 만큼, 29.4% 인수 기회는 SK가 이미 포기한 것이라는 주장도 폈다.

이에 심사관은 소수지분이라고 반드시 경영권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고, 실트론 지분 100%를 인수할 경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주주의 경영간섭 최소화 등의 이익이 존재했다고 반박했다. KTB PE와의 양해각서 역시 예외 조항이 있어 추가 지분 인수가 불가능하지 않았다고 했다.

양측은 'SK가 자신의 사업 기회를 최 회장에게 제공한 것인지'를 두고도 다퉜다.

SK 측은 최 회장이 공개경쟁 입찰에 참여해 경쟁 끝에 적격투자자로 선정된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심사관은 입찰당사자 간 재량이 많았고 SK의 비협조로 다른 인수 후보자의 입찰 참여는 사실상 제한됐다고 맞섰다.

'SK가 합리적으로 자신의 사업 기회를 포기했는지'에 대해서 SK 측은 충분한 검토를 거쳐 29.4%는 취득하지 않기로 결정한 후 최 회장이 입찰 참여 의사를 밝혔으므로 SK의 입찰 불참 결정에 이사회 결의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심사관은 최 회장이 지분 취득 의사를 밝힐 때까지 SK가 해당 지분 포기 결정을 한 적이 없고, 이사회 의결을 거치지 않아 상법 위반일 뿐 아니라 공정거래법상 합리적인 사업 기회 포기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 공정위 "총수의 '회사 사업 기회 이용' 첫 제재"
결국 전원회의에 참석한 5명의 위원이 SK와 최 회장의 위법성이 인정된다며 심사관 손을 들어주면서, 이번 사건은 총수의 계열사 사업 기회 이용행위를 처음으로 제재한 사례가 됐다.

공정위는 2019년 대림그룹 사건 때도 사업 기회 제공행위를 제재했으나, 당시 대림산업은 그룹의 호텔 브랜드 '글래드'(GLAD) 상표권을 총수 일가 지분율 100%인 APD에 넘겨준 것이 문제였다.

기업이 아닌 지배주주, 총수 개인이 절대적 지배력과 내부정보를 활용해 계열사 재산인 사업 기회를 받은 사례에 대한 제재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업 기회를 직접 제공한 것은 아니지만 회사 이익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가 사업 기회를 포기해 상대방이 이를 이용하게 하는 '소극적' 방식의 사업 기회 제공행위를 제재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육성권 기업집단국장은 "공정거래법상 사업 기회 제공행위와 사실상 동일한 행위를 규제하는 상법상 '회사기회유용금지 규정이 도입된 지 10년이 지난 현재까지 해당 규정을 적용한 소송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에서 의의가 크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최근 특수관계인이 회사와 함께 지분 인수에 참여하는 행위가 자주 이뤄지고 있는 만큼, 이번 제재가 '이익충돌 상황에서의 회사 사업 기회 포기'에 대한 합리적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했다.

즉 이사회와 같은 적법한 기관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 받고 이사들이 합리적 판단을 내릴 경우에는 합리적 경영 판단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제재를 계기로 책임경영을 위한 총수의 계열사에 대한 직접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와 관련해 육 국장은 "지배주주가 (사업 기회를) 가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 회사가 무조건 다 사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오해며, (회사가 사업기회를) 합리적인 사유로 포기했다면 공정거래법상 위반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룹 전부를 조사할 계획도 없다고 덧붙였다.
◇ 고발 빠져 '봐주기' 논란…의무고발요청·주주대표소송 가능성도
공정위가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제재 내용에서 검찰 고발을 빼고 과징금도 16억원 밖에 부과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애초 공정위 심사관은 최 회장에 대한 검찰 고발 조치를 요청했으나 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고발 조치가 제외됐다.

전원회의 위원들은 위반 행위의 정도가 중대·명백하다고 보기 어려운 점, 최 회장이 SK에 사업 기회 제공을 지시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없는 점, 법원과 공정위 선례가 없어 명확한 법 위반 인식을 갖고 행해진 행위라고 보기 어려운 점 등에서 검찰 고발을 하지 않기로 판단했다.

검찰총장·감사원장·중소벤처기업부장관·조달청장이 요청할 경우 공정위가 반드시 검찰에 고발하도록 하는 '의무고발요청 제도'에 따라 여전히 고발 가능성도 남아 있다.

공정위에 이 사건 조사를 요청한 시민단체 '경제개혁연대'는 논평에서 더 엄중한 제재를 위해 검찰총장이 공정위에 고발요청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정위는 과징금 규모가 크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현행 규정상 제공 대상 사업기회가 주식취득 기회인 경우 법 위반금액, 사업기회를 받은 객체의 관련 매출액을 산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행 과징금 고시는 자연인인 특수관계인이 사업 기회를 받더라도 과징금 산정 기준이 되는 '위반금액'을 정할 때 '관련 매출액'을 기준으로 하도록 규정해 '정액 과징금'을 부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공정위는 추후 산정 방식 개선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공정위 제재로 위법성이 인정된 만큼 SK 주주들이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최태원의 이익에 상응하는 금액만큼 SK의 손해로 볼 수 있다"며 "국민연금(지분 8.16% 보유)을 포함해 SK 주주들은 최태원을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해 SK의 사업기회 제공으로 발생한 손해가 모두 회사에 귀속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