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나 "H&M 같은 기성복 아닌 맞춤복 만드는 연출가 되겠다"

뮤지컬 '썸씽로튼'·'잃어버린 얼굴' 연출…"개성 있는 창작자 키워야"
"'썸씽로튼', 읽자마자 하고 싶어…나는 왜 이런 작품 못 쓰나 질투도"
"나에겐 왜 이런 걸 쓰는 재능이 없나 질투까지 난 작품입니다. "
지난달 두 번째 시즌 막을 올린 뮤지컬 '썸씽로튼'의 이지나 연출은 최근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대본을 처음 봤을 때 느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르네상스가 한창이던 1595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당대 최고의 스타 작가 셰익스피어에 맞서 인류 최초의 뮤지컬을 제작한 닉·나이젤 바텀 형제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유쾌한 분위기와 유머, 독특한 스토리로 초연 당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이 연출이 라이선스 뮤지컬을 선보이는 것은 2017년 막을 내린 '인 더 하이츠' 이후 약 5년 만이다.

그간 '서편제', '광화문연가', '나빌레라', '곤 투모로우', '더 데빌' 등 창작 뮤지컬 연출을 도맡아 왔다.

라이선스 작품 연출은 현장감독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썸씽로튼'의 매력은 무엇일까. 이 연출은 "한국에 잘 없는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는 작품"이라며 "얼렁뚱땅 엎치락뒤치락하는 듯해 보일 수 있지만, 수준 높은 스토리를 자랑한다"고 힘줘 말했다.

"게다가 음악까지 좋아요.

가볍고 통통 튀면서 의미도 있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습니다. 두 시간 반 동안 엔도르핀을 마구마구 솟게 해요.

'정말 좋은 작품이구나, 나도 연출하면서 배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쓸 작품이라면, 라이선스라도 해야죠(웃음)."
오리지널 제작사 측이 자유롭게 각색을 허용한 점도 매력적이었다.

덕분에 브로드웨이와 거의 흡사했던 초연과 달리 재연은 '한국식'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중후한 멋이 있는 40대 셰익스피어는 K팝 아이돌처럼 바뀌었고, 열등감에 시달리는 배 나온 아저씨 닉 바텀은 젊고 잘생긴 배우들이 연기했다.

극에서 인용하는 뮤지컬 중 국내에서 유명하지 않은 작품은 과감히 빼고 국내 팬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채워 넣었다.

'지킬 앤 하이드', '헤드윅' 등의 장면을 패러디하는가 하면 '서편제'의 구성진 가락도 흘러나온다.

"우리 관객 누구나 알아듣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대신 넣었습니다.

예전에 '인 더 하이츠'를 연출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토씨 하나도 못 바꾸게 하더라고요.

한국 정서와 거리가 먼 작품이었는데도 불구하고요.

아주 답답했죠."
작품에 대한 애정이 큰 만큼 공연 때 빈자리를 보면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에 슬프기도 하다고 이 연출은 말했다.

관객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뮤지컬'이 아닌 작품도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뮤지컬은 '이런 것'이라고 딱 떨어지는 예술이 아닙니다.

색다른 소재와 형식으로 얼마든지 즐거움을 줄 수 있어요.

룰을 정해 놓지 않을 때 독특하고 기발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오는 3월 개막하는 이 연출의 대표작 '잃어버린 얼굴 1895'도 규칙을 파괴한 뮤지컬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배경으로 인물들의 갈등과 정치적 세력 다툼을 그렸다.

이 연출은 "총체극 같은 요소가 가득하고 미장센이 중요한 작품"이라며 "관객이 한정적이지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고 했다.

"2014년에 괴테 '파우스트'를 모티프로 만든 '더 데빌'을 올렸을 때 엄청나게 욕을 먹었어요.

미쳤냐고, 이게 뮤지컬이냐고요.

하하. 지금은 마니아 관객이 생겨서 네 번째 공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 창작자를 발굴해야 해요.

"
그는 스타 배우와 라이선스 대작 위주로 흘러가는 국내 뮤지컬계의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천편일률적인 작품이 아니라 독특한 작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연출 역시 좋은 창작 뮤지컬을 계속 무대에 올리는 게 목표다.

"저는 기성복인 H&M 같은 사람이 될 생각이 없어요.

작지만 디자이너 이름을 건 브랜드 같은 연출가, 콘텐츠 발굴자로 남고 싶어요.

'이지나 표' 맞춤복 같은 거죠. 제가 직접 콘텐츠가 될 만한 것을 찾아 나서서 좋은 뮤지컬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