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사찰 정원석, 신라 비석이었다…"가장 오래된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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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국·이영호 교수, 8세기 비문 80자 판독해 '공순아찬신도비' 명명
"국립경주박물관 '찬지비'의 서두 부분…글씨는 명필 김생이 쓴 듯"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신도비(神道碑) 일부가 경북 경주에서 발견됐다. 죽은 사람의 행적을 적은 비석인 신도비는 고려시대 이전 실물이 전혀 없다고 알려져 왔다.
이 비석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찬지비'(湌之碑)의 오른쪽 윗부분으로 판명됐다.
찬지비는 1963년 11월 발견됐으며, 머릿돌인 이수 파편 1점과 비석 파편 2점이 남아 있다. 이수에 '찬지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고고학 연구자인 박홍국 위덕대 교수는 경주 남산동에 있는 사찰 '남산사'의 정원에 있던 석재를 조사해 8세기에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공순 아찬의 신도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26일 밝혔다.
남산사는 기존 찬지비 발견 장소에서 남쪽으로 약 500m 거리에 있다. 이번에 확인된 비석은 재질이 화강암이며, 가로 21∼30㎝, 세로 56.5㎝, 두께 25.6㎝다.
박 교수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이수 크기를 근거로 비석이 본래 가로 70∼80㎝, 세로 160∼180㎝였을 것으로 추산했다.
또 정교하게 조각한 이수에 걸맞은 거북 모양 받침돌인 귀부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비석에는 한쪽 면에만 세로 1.8∼2.8㎝인 글자 약 100자가 남아 있다.
박 교수는 신라사를 전공한 이영호 경북대 교수와 함께 비문 80자를 판독했다. 비문의 가장 오른쪽에는 '공순아찬공신도지비'(恭順阿湌公神道之碑)라는 글자가 있다.
'공순'은 비석 주인 이름이고, '아찬'은 신라 17등 관계(官階) 중 6등에 해당한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이 글을 토대로 비석을 '공순아찬신도비'로 명명했다.
박 교수는 "경주박물관 찬지비는 중요한 금석문(金石文)임에도 판독 내용이 단편적이어서 연구자들이 작성한 논고가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며 "찬지비와 재질, 서체가 같은 새로운 비편(碑片)을 통해 실체를 대략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비석 제작 시기의 단서가 되는 단어로 7행에 나오는 '천령군'(天嶺郡)을 꼽았다.
천령군은 경남 함양의 옛 지명으로, 757년부터 사용됐다.
그는 "천령군이라는 글자가 신라 금석문에서 확인된 첫 사례로, 비석은 757년 이후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며 "이수를 또 다른 신라 비석인 무열왕릉비나 800년 무렵 완성된 무장사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 이수와 비교하면 800년 이전 작품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이어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실물 신도비는 조선 태조 건원릉 신도비였는데, 신라 신도비가 발견됐다는 점이 무척 놀랍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비문에 '신라국의 김씨'를 의미하는 '신라국지김씨'(新羅國之金氏)와 '우리 김씨'로 해석되는 '아김씨'(我金氏)라는 구절이 있다고 했다.
그는 전설의 고대 제왕인 황제(黃帝) 아들 '소호'(少昊)와 '태종대왕의 손자'를 뜻하는 '태종대왕지손자'(太宗大王之孫者)라는 대목을 주목했다.
이 교수는 "역사서에서 공순이라는 사람을 찾지는 못했다"며 "공순이 태종 무열왕 손자인지, 아니면 공순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무열왕 손자인지도 명확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씨 관련 구절에서 신라시대 김씨들의 자존의식을 엿볼 수 있다"며 "아찬은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지만, 상당히 큰 신도비가 세워졌다는 점에서 공순은 진골일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비문에는 정자체인 해서, 흘림체인 초서, 해서와 초서의 중간에 해당하는 행서가 모두 쓰였다.
가장 많이 사용된 서체는 행서다.
박 교수는 비석 서체가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 글씨와 유사하지만, 신라 명필로 명성이 높았던 김생이 비문을 쓴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글씨에서 필력, 해학, 자유분방함 속에 기이한 품격이 느껴진다"며 "김생 글씨를 모아 만들었다고 하는 낭공대사비와 흡사한 글자가 많다"고 전했다.
이어 "이 비석은 동일한 글자를 일부러 다르게 쓸 정도로 예술성이 있다"며 "8세기 이전 비석 중에 해서, 행서, 초서를 함께 사용한 예는 매우 드물다"고 덧붙였다. 남산사 주지 선오 스님은 지난 20일 정원석을 정리하다 희미한 글자를 본 뒤 박 교수에게 판독과 고증을 부탁했다. 박 교수로부터 비석에 관한 설명을 들은 선오 스님은 25일 비석의 국가 귀속을 위해 경주시에 매장문화재 발견 신고를 했다. /연합뉴스
"국립경주박물관 '찬지비'의 서두 부분…글씨는 명필 김생이 쓴 듯"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신도비(神道碑) 일부가 경북 경주에서 발견됐다. 죽은 사람의 행적을 적은 비석인 신도비는 고려시대 이전 실물이 전혀 없다고 알려져 왔다.
이 비석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찬지비'(湌之碑)의 오른쪽 윗부분으로 판명됐다.
찬지비는 1963년 11월 발견됐으며, 머릿돌인 이수 파편 1점과 비석 파편 2점이 남아 있다. 이수에 '찬지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고고학 연구자인 박홍국 위덕대 교수는 경주 남산동에 있는 사찰 '남산사'의 정원에 있던 석재를 조사해 8세기에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공순 아찬의 신도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26일 밝혔다.
남산사는 기존 찬지비 발견 장소에서 남쪽으로 약 500m 거리에 있다. 이번에 확인된 비석은 재질이 화강암이며, 가로 21∼30㎝, 세로 56.5㎝, 두께 25.6㎝다.
박 교수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이수 크기를 근거로 비석이 본래 가로 70∼80㎝, 세로 160∼180㎝였을 것으로 추산했다.
또 정교하게 조각한 이수에 걸맞은 거북 모양 받침돌인 귀부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비석에는 한쪽 면에만 세로 1.8∼2.8㎝인 글자 약 100자가 남아 있다.
박 교수는 신라사를 전공한 이영호 경북대 교수와 함께 비문 80자를 판독했다. 비문의 가장 오른쪽에는 '공순아찬공신도지비'(恭順阿湌公神道之碑)라는 글자가 있다.
'공순'은 비석 주인 이름이고, '아찬'은 신라 17등 관계(官階) 중 6등에 해당한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이 글을 토대로 비석을 '공순아찬신도비'로 명명했다.
박 교수는 "경주박물관 찬지비는 중요한 금석문(金石文)임에도 판독 내용이 단편적이어서 연구자들이 작성한 논고가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며 "찬지비와 재질, 서체가 같은 새로운 비편(碑片)을 통해 실체를 대략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비석 제작 시기의 단서가 되는 단어로 7행에 나오는 '천령군'(天嶺郡)을 꼽았다.
천령군은 경남 함양의 옛 지명으로, 757년부터 사용됐다.
그는 "천령군이라는 글자가 신라 금석문에서 확인된 첫 사례로, 비석은 757년 이후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며 "이수를 또 다른 신라 비석인 무열왕릉비나 800년 무렵 완성된 무장사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 이수와 비교하면 800년 이전 작품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이어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실물 신도비는 조선 태조 건원릉 신도비였는데, 신라 신도비가 발견됐다는 점이 무척 놀랍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비문에 '신라국의 김씨'를 의미하는 '신라국지김씨'(新羅國之金氏)와 '우리 김씨'로 해석되는 '아김씨'(我金氏)라는 구절이 있다고 했다.
그는 전설의 고대 제왕인 황제(黃帝) 아들 '소호'(少昊)와 '태종대왕의 손자'를 뜻하는 '태종대왕지손자'(太宗大王之孫者)라는 대목을 주목했다.
이 교수는 "역사서에서 공순이라는 사람을 찾지는 못했다"며 "공순이 태종 무열왕 손자인지, 아니면 공순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무열왕 손자인지도 명확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씨 관련 구절에서 신라시대 김씨들의 자존의식을 엿볼 수 있다"며 "아찬은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지만, 상당히 큰 신도비가 세워졌다는 점에서 공순은 진골일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비문에는 정자체인 해서, 흘림체인 초서, 해서와 초서의 중간에 해당하는 행서가 모두 쓰였다.
가장 많이 사용된 서체는 행서다.
박 교수는 비석 서체가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 글씨와 유사하지만, 신라 명필로 명성이 높았던 김생이 비문을 쓴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글씨에서 필력, 해학, 자유분방함 속에 기이한 품격이 느껴진다"며 "김생 글씨를 모아 만들었다고 하는 낭공대사비와 흡사한 글자가 많다"고 전했다.
이어 "이 비석은 동일한 글자를 일부러 다르게 쓸 정도로 예술성이 있다"며 "8세기 이전 비석 중에 해서, 행서, 초서를 함께 사용한 예는 매우 드물다"고 덧붙였다. 남산사 주지 선오 스님은 지난 20일 정원석을 정리하다 희미한 글자를 본 뒤 박 교수에게 판독과 고증을 부탁했다. 박 교수로부터 비석에 관한 설명을 들은 선오 스님은 25일 비석의 국가 귀속을 위해 경주시에 매장문화재 발견 신고를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