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되는 부동산 법률] 의뢰인을 법정 귀머거리로 만든 웃픈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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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
최근 재판에서 멀쩡한 의뢰인을 귀머거리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웃픈 사연이 있었다. 20여년 변호사 생활에서 처음 겪은 특이한 사건이라 소개키로 한다.
1심 재판에서 불의의 패소를 당해 항소심을 진행하는 어느 의뢰인을 소송대리하고 있었다. 억울하게 패소한 사건이라 마음을 다해 변론했고 2심 재판의 판결선고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선고기일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변론재개와 함께 새로운 기일에 출석하라는 통지를 받게 되었다. 늘상 그래왔지만 이번에도 변론재개한 이유에 대해 법원으로부터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궁금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참석한 재개된 변론기일에서 ‘이 사건의 판단을 위하여 피고 당사자 본인신문의 필요가 있다’는 재판장의 말을 듣게 되었다. 뜻밖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사자본인 신문은 쟁점 판단을 위한 다른 증거가 없을 때만 아주 보충적으로 이루어지는 절차로서 일반적인 재판부로서는 채택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건 재판장은 적극적으로 피고 본인신문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사건은 기본사실관계에는 큰 다툼이 없었고 애매하게 기재된 계약서 문구해석이 쟁점이어서 당사자 본인신문의 필요도 크지 않았다. 피고 소송대리인이었던 필자, 상대방 소송대리인 모두 재판장의 이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재판장의 말을 듣고도 말없이 잠시 동안 재판장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이 재판장은 피고 본인신문을 기정사실로 하고서 피고 본인신문을 누가 신청할건지를 양 대리인에게 물었다. 피고 본인 신문에 대한 재판장의 강력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1심에서 패소한 피고 본인의 신문필요성을 재판장이 강하게 언급한다는 것은 통상 1심과 다른 판단 가능성을 시사하는 메시지로 이해될 수 있어, 당부를 떠나 일단 우리에게 유리한 국면이라는 판단하에 ‘피고측이 신청하겠다’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자 판세의 불리함을 느낀 때문인지 상대방 소송대리인은 ‘그렇다면 원고 본인신문도 신문하게 해달라’고 재판장에게 요구했고, 결국 원피고 모두에 대한 본인신문을 진행하게 되었다. 재판장의 적극적인 권유로 시작되어 그것도 양측 본인 모두를 신문하게 되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절차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그 후 절차에 맞춰, 필자는 의뢰인인 피고 본인에 대한 신문신청서와 신문사항을, 상대방 소송대리인은 원고 본인에 대한 신문신청서와 신문사항을 준비해서 재판기일 전에 제출했다. 드디어 당사자 본인신문 예정 당일!
당사자 본인신문은 이미 변론과정에서 주장된 각자에게 유리한 주장을 본인신문이라는 문답형식으로 진행한다. 각자의 주장을 바탕으로 하는 절차인 만큼 당사자가 이미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 대리인으로서는 큰 부담이 없는 절차이다. 게다가, 재판에서 제3자의 지위에 있는 증인에 비해 당사자 본인은 재판에 이해관계가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술의 신빙성도 크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여러모로 증인신문에 비하면 부담없는 절차인 셈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사자 신청이 아니라 재판장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당사자신문이 진행되는터라 일반적인 사건에 비해 피고 본인 신문에 더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충분한 준비를 위해 재판 시간 몇시간 전에 의뢰인을 만나 점심식사까지 같이 하면서 신문을 준비했다. 그런데,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지금까지 수년간 필자와 대화나누며 자기주장을 정리하는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의뢰인이었지만, 80세라는 나이 때문인지 길고 변형된 질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시험으로 치면 지문이 긴 응용문제인 셈이다. 게다가, 의뢰인은 평생 처음으로 증인(당사자본인)으로 출석해서 그런지 진술시간이 임박해오자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여서, 여러 차례 설명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핵심에서 벗어난 엉뚱한 답변을 하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는 피고 본인신문에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었지만, 재판장이 변론을 재개하면서까지 각별한 의미를 두고 진행하는 절차인지라 이 상황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통상 당사자 본인신문 절차는, 자기에게 유리한 진술만하고 불리한 진술은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부인해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라, 진술을 잘 해야 본전인, 다시 말하면 스스로에게 유리한 진술은 적당히 신빙되는 반면, 불리한 진술은 결정적인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부담이 있어, 실수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다급한 마음에 갖은 방법으로 의뢰인의 답변을 도왔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의뢰인의 이런 상태로는 상대방이나 재판부의 변형된 질문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답변이 꼬여버릴 가능성이 컸다. 지정된 재판시간은 이제 30분 후,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고민 끝에 생각한 방법은 바로 “귀머거리” 행세. 제대로 된 답변을 못해 결정적 위험을 감수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청력이 약해 신문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이유로 회피하는 전략인 셈이다. 지금까지의 변론을 통해 계약서 해석이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아 피고 본인신문 없이도 1심 판단을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이런 결정에 바탕이 될 수 있었다. 이해도가 떨어지는 피고본인을 이 상태로 신문대에 올리는 것은 너무 위험한 도박으로 판단했다. 물론, 귀머거리 행세가 아니라 아예 불출석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지만 적절치 않았다. 증인신문과 달리 당사자 본인신문은 비록 출석의무는 없지만, 불출석할 경우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민사소송법상 규정도 있지만, 재판장이 큰 비중을 두고 있는 사람을 특별한 이유없이 불출석하게하는 것은 재판부에 무성의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의표시 차원에서라도 일단 출석은 하되 들리지 않는다는 전략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 민사소송법 제369조(출석ㆍ선서ㆍ진술의 의무)
당사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출석하지 아니하거나 선서 또는 진술을 거부한 때에는 법원은 신문사항에 관한 상대방의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나이 때문에 사건이해를 제대로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의뢰인도 스스로 너무 참담해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어 필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멀쩡하게 잘 들리는데 가짜 귀머거리 행세를 해야하기 때문이었다. 솔직하고 착한 성품의 이 의뢰인에게는 거짓 연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나 의뢰인 모두에게 절박한 상황이라 다급한 마음에 의뢰인과 십여분 정도의 귀머거리 연습까지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드디어 법정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의뢰인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드디어 우리 재판 시작! 당사자 본인출석 확인 후, 청력문제로 신문이 곤란하다는 취지로 변론했다. 재판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긴장했는데, 너무나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별 대수롭지 않은 듯 ‘일단 원고본인부터 신문합시다’라고 가볍게 반응했다. 피고 본인신문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듯한 모습은 전혀 없었다. 피고 본인신문에 적극적이었던 그동안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피고를 증인석에 세워 목소리를 크게 해서라도 신문을 강행하지는 않을까, 그런 상황을 진솔한 성품의 의뢰인이 잘 견딜 수 있을까하는 고민은 지나친 기우였던 셈이다. 그동안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웃픈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원고 본인을 증인석에 올린 재판장은 대뜸 ‘원고본인신문신청을 누가 신청했느냐’고 양측 대리에게 질문했고, 양측 대리인 모두 ‘원고측이 신문신청을 했고 그에 따른 신문사항 역시 원고측에서 이미 제출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재판장은, ‘지난 기일에 원고본인신문신청은 피고측이, 피고본인신문은 원고측이 신청하도록 채택했다’고 하며, 양측 소송대리인의 기억과는 전혀 상반되게 이야기했다(만약, 재판장의 기억이 맞다면 재판부는 재판기일 전에 미리 소송지휘를 통해 신문신청서를 다시 제출하게 하는 등의 조치를 했어야 한다). 양 대리인이 어리둥절하는 사이 재판장은 ‘내 기억이 틀림없으니, 채택된 바대로 원고본인에 대한 주신문을 피고 소송대리인이 하라’고 주문했다. 원고 본인에 대한 주신문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필자가 난감해하자, 재판장은 ‘원고 소송대리인이 준비한 신문사항의 몇항, 몇항을 피고 소송대리인이 물어보라’는 식의 기상천외한 주문을 했다. 통상적인 실무관행과 동떨어진 뚱딴지같은 진행인 셈이었다. 칼자루를 쥔 재판장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진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돌발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자신의 소송대리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온 원고본인이 갑작스러운 그것도 약간 변형된 상대방 소송대리인의 질문을 받게 되자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머지 질문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불리한 답변을 해버린 것이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일방적 진행에 바뀐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당황해버린 것이다. 더구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답변을 왜 일관되게 하지 않느냐’는 식의 원고본인에 대한 재판장 질책이 이어지자, 원고본인의 답변은 점점 더 꼬여버렸다. 이해가 부족한 의뢰인을 어설프게 신문했을 때 필자가 우려했던 바로 그 상황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적중되어버린 셈이다. 표정은 진지함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속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은 참을 수 없었다. 방청석에 대기하던 의뢰인 역시 부담스러운 상황에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재판 내내 지긋이 웃고 있었다.
힘겹게 원고 본인 신문을 마친 후 이번에는 피고 본인신문을 할 차례였다. 그런데,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원고본인신문에 제법 긴시간이 소요되자 재판장은 ‘재판도 지체되고 귀도 잘 안들린다고 하니 피고 본인신문은 취소하겠다’고 일축하고서 재판을 종결했다. 종결된 변론을 재개하면서 피고본인 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지난번 태도는 오간데 없었다. 결국 지금까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재판장은 지극히 즉흥적이고 권위적인 성격이었고 피고본인에 대한 신문 필요 역시 일시적인 느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의뢰인과 필자는 초긴장 상태로 반나절을 보낸 셈인데, 우여곡절 끝에 어려운 재판을 마쳐 피곤했지만 탁월한 전략선택에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최종적인 재판결과를 떠나 오늘 하루가 너무 행복하다’는 의뢰인의 말씀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재판을 업으로 하면서 여러 판사를 대하는 변호사인 필자로서도 너무나 특별한 경험인지라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하루로 기억될 것이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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