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예술, 자코메티[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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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60대 화가가 모델을 바라보며 열심히 초상화를 그립니다. 한참 시간이 흘러 끝이 난 줄 알았지만 끝이 아닙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큰 붓을 들어 그림을 다른 색으로 덧칠해 버립니다. 기껏 그린 초상화를 모조리 지운 겁니다.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다음 날이면 다시 그리고, 지우길 반복합니다. 하루면 끝이 날 것이라고 했던 작업은 그렇게 18일에 걸쳐 진행됩니다. 모델은 점점 지쳐가죠. 과연 이 그림은 완성될 수 있을까요. 스탠리 투치 감독의 영화 '파이널 포트레이트'(2018)의 내용입니다. 스위스 조각가이자 화가였던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가 미국 출신의 작가 제임스 로드를 모델로 삼아 초상화 작업을 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로드가 이 경험을 담아 <작업실의 자코메티>란 책을 썼고 영화로 재탄생한 겁니다. 배우 제프리 러쉬가 자코메티 역을, 아미 해머는 로드 역을 맡았습니다. 작품에서 다룬 로드의 초상화는 자코메티가 생애 마지막으로 작업한 초상화입니다. 자코메티는 미술 시장에서 최고가 경신을 연이어 이뤄낸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2010년엔 '걸어가는 사람'이 런던 소더비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2015년엔 '가리키는 남자'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했죠. 파블로 피카소도 20살이나 어렸던 자코메티를 인정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작품 비평을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자코메티는 후기 인상파 화가인 조반니 자코메티의 아들입니다. 화가 아버지를 둔 덕에 일찍 그림을 접하고 배울 수 있었죠. 그는 조각과 회화에서 두루 두각을 나타냈고,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앙상하고 마른 얼굴과 몸을 하고 있습니다. 자코메티가 가진 실존주의적 사상이 표현된 건데요. 그는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받아들인 대표적인 예술가로 꼽힙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의 실존은 연약한 것이며, 죽음에 의해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라는 겁니다.
자코메티는 여동생의 죽음, 세계대전을 잇달아 거치며 실존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작품 활동을 통해 나약하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과 끊임없이 마주하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는 작업 방식은 독특했습니다. 자코메티의 조각은 엄연히 말해 일반적인 조각과는 다릅니다. 원래 조각은 단단한 재료를 밖에서 안으로 깎아 들어가며 만듭니다. 반면 소조는 찰흙처럼 부드러운 재료를 안에서 밖으로 붙여가며 만들죠. 자코메티는 뼈대 위에 찰흙을 붙여나가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걸 보면 조각이 아니라 오히려 소조처럼 느껴지는데요. 그런데 자코메티는 살을 붙인 다음, 다시 살을 조금씩 떼어가는 작업을 했습니다. 즉 조각과 소조를 결합했다고 할 수 있죠.
영화에서 알 수 있듯 자코메티는 다소 괴팍한 예술가였습니다. 자신이 실컷 그린 초상화를 지우거나 조각을 깨부수는 등 수없이 작업을 원점으로 되돌렸습니다. 한두 번은 그럴 수 있겠지만, 보는 사람들이 지칠 정도로 이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영화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사들이 나옵니다. "쉬운 것에 만족하기는 쉬운 법이지." "너무 많이 갔네. 동시에 충분히 못 갔고." 그는 실존주의를 기반으로 인간의 고독과 본질을 최대한 담으려 했습니다. 겉만 봐선 쉽게 눈치채지 못할 만큼 깊은 내면을 최대한 끄집어 내고 싶어 했죠. 영화에서 로드에게 살인자, 변태 같은 얼굴이라고 농담 같은 진담을 하는 장면도 이 점을 부각시킨 겁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업엔 끝이 없었습니다.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게 인간의 내면인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그는 예술의 완성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자코메티의 예술은 매일 죽고 매일 다시 태어났습니다. "가장 아쉬운 건 사람이 딱 한번 죽는다는 점이다. 다시 태어나면 삶에 중요한 부분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뀔 것이다. 나는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난다. 내 작품들도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자코메티는 성공 가도를 달렸음에도 늘 낡고 초라한 작업실에서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펼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는 성공의 기쁨과 무게를 모두 알았던 것 같습니다. "성공보다 더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게 있나”라는 대사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의 구도자적인 면은 작품에도 잘 담겨 있습니다. '걸어가는 사람'은 바스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뚝 서서 묵묵히 걸어가는 인간을 보여줍니다. '가리키는 남자' 역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딘지 명확히 알고 가리키며, 위대한 여정이 시작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삶은 고행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매일같이 험난한 산들을 넘고 또 넘어야 하죠. 그러다 어느 날은 모두 놓아 버리고 주저앉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시 힘을 내 오늘을 살아가고 계신 여러분께 자코메티의 말이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다음 날이면 다시 그리고, 지우길 반복합니다. 하루면 끝이 날 것이라고 했던 작업은 그렇게 18일에 걸쳐 진행됩니다. 모델은 점점 지쳐가죠. 과연 이 그림은 완성될 수 있을까요. 스탠리 투치 감독의 영화 '파이널 포트레이트'(2018)의 내용입니다. 스위스 조각가이자 화가였던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가 미국 출신의 작가 제임스 로드를 모델로 삼아 초상화 작업을 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로드가 이 경험을 담아 <작업실의 자코메티>란 책을 썼고 영화로 재탄생한 겁니다. 배우 제프리 러쉬가 자코메티 역을, 아미 해머는 로드 역을 맡았습니다. 작품에서 다룬 로드의 초상화는 자코메티가 생애 마지막으로 작업한 초상화입니다. 자코메티는 미술 시장에서 최고가 경신을 연이어 이뤄낸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2010년엔 '걸어가는 사람'이 런던 소더비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2015년엔 '가리키는 남자'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했죠. 파블로 피카소도 20살이나 어렸던 자코메티를 인정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작품 비평을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자코메티는 후기 인상파 화가인 조반니 자코메티의 아들입니다. 화가 아버지를 둔 덕에 일찍 그림을 접하고 배울 수 있었죠. 그는 조각과 회화에서 두루 두각을 나타냈고,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앙상하고 마른 얼굴과 몸을 하고 있습니다. 자코메티가 가진 실존주의적 사상이 표현된 건데요. 그는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받아들인 대표적인 예술가로 꼽힙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의 실존은 연약한 것이며, 죽음에 의해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라는 겁니다.
자코메티는 여동생의 죽음, 세계대전을 잇달아 거치며 실존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작품 활동을 통해 나약하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과 끊임없이 마주하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는 작업 방식은 독특했습니다. 자코메티의 조각은 엄연히 말해 일반적인 조각과는 다릅니다. 원래 조각은 단단한 재료를 밖에서 안으로 깎아 들어가며 만듭니다. 반면 소조는 찰흙처럼 부드러운 재료를 안에서 밖으로 붙여가며 만들죠. 자코메티는 뼈대 위에 찰흙을 붙여나가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걸 보면 조각이 아니라 오히려 소조처럼 느껴지는데요. 그런데 자코메티는 살을 붙인 다음, 다시 살을 조금씩 떼어가는 작업을 했습니다. 즉 조각과 소조를 결합했다고 할 수 있죠.
영화에서 알 수 있듯 자코메티는 다소 괴팍한 예술가였습니다. 자신이 실컷 그린 초상화를 지우거나 조각을 깨부수는 등 수없이 작업을 원점으로 되돌렸습니다. 한두 번은 그럴 수 있겠지만, 보는 사람들이 지칠 정도로 이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영화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사들이 나옵니다. "쉬운 것에 만족하기는 쉬운 법이지." "너무 많이 갔네. 동시에 충분히 못 갔고." 그는 실존주의를 기반으로 인간의 고독과 본질을 최대한 담으려 했습니다. 겉만 봐선 쉽게 눈치채지 못할 만큼 깊은 내면을 최대한 끄집어 내고 싶어 했죠. 영화에서 로드에게 살인자, 변태 같은 얼굴이라고 농담 같은 진담을 하는 장면도 이 점을 부각시킨 겁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업엔 끝이 없었습니다.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게 인간의 내면인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그는 예술의 완성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자코메티의 예술은 매일 죽고 매일 다시 태어났습니다. "가장 아쉬운 건 사람이 딱 한번 죽는다는 점이다. 다시 태어나면 삶에 중요한 부분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뀔 것이다. 나는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난다. 내 작품들도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자코메티는 성공 가도를 달렸음에도 늘 낡고 초라한 작업실에서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펼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는 성공의 기쁨과 무게를 모두 알았던 것 같습니다. "성공보다 더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게 있나”라는 대사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의 구도자적인 면은 작품에도 잘 담겨 있습니다. '걸어가는 사람'은 바스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뚝 서서 묵묵히 걸어가는 인간을 보여줍니다. '가리키는 남자' 역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딘지 명확히 알고 가리키며, 위대한 여정이 시작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삶은 고행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매일같이 험난한 산들을 넘고 또 넘어야 하죠. 그러다 어느 날은 모두 놓아 버리고 주저앉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시 힘을 내 오늘을 살아가고 계신 여러분께 자코메티의 말이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