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문화] (45)"관덕정은 지켜봤다" 제주의 600년 역사를

신축항쟁과 4·3 등 굵직한 제주 역사의 산현장
11차례 보수 끝에 제모습 찾아 오늘날 이어져

[※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독특한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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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가까이 제주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관덕정(觀德亭).
현존하는 제주의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자 제주의 가장 중요한 문화재(보물 제322호) 중 하나로 꼽힌다.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관덕정이 제주에서 갖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 제주 역사의 산증인
툭 튀어나온 눈을 부릅뜬 돌하르방이 제주 옛 도심의 오래된 건축물 하나를 지키고 서 있다.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의 단층 목조건물인 관덕정이다.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로, 사방이 탁 트이게 뚫려 있고 26개의 둥근 기둥이 커다란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새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듯 시원스럽게 뻗은 지붕 선이 관덕정의 웅장한 멋을 드러낸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제주의 지역적 특성상 처마 길이를 다른 지역의 것보다 더 길게 만들었다고 한다.
제주에 몇 안 되는 보물 문화재임에도 남녀노소 누구나 잠시 관덕정 마루에 앉아 지친 다리를 쉴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관덕정은 세종 30년 1448년 안무사 신숙청(辛淑晴)이 병사훈련과 무예수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했다.

관덕정이란 이름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射者所以 觀盛德也)라고 하는 유교 경전 '예기'(禮記)의 한 문구에서 유래하고 있다.

엣 사람들은 활쏘기(射)를 몸과 마음을 닦는 중요한 수련 과정으로 여겼던 만큼 관덕정 앞에서 활쏘기 대회가 열리곤 했다.

조선시대 제주의 모습을 그린 43면으로 된 기록 화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통해 관덕정에서 이뤄진 각종 행사를 엿볼 수 있다.

활쏘기 대회장면은 물론 목사가 임금에게 진상할 말들을 점검하는 모습, 선비들이 과거를 보는 모습 등이 담겼다.

겨울이 가고 새봄을 맞이할 때면 관덕정 앞마당에서는 민(民)·관(官)·무(巫)가 하나 돼 풍년과 무사안녕을 비는 '입춘굿'이 펼쳐지기도 했다.

1641년에는 제주에 유배됐다 운명을 달리한 광해군의 관이 관덕정으로 옮겨졌고, 이곳에 빈소가 마련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관덕정 앞 광장은 격동의 제주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제주 출신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이정재·심은하 주연의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1901년 신축항쟁의 현장이었다.

민란의 우두머리였던 이재수가 프랑스 선교사를 등에 업고 각종 악행을 저지른 천주교인 300여명을 관덕정 광장에서 직접 처단했다.

해방 이후에는 경찰이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나오는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아 4·3의 시발점이 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발발한 곳이기도 하고,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십자형 틀에 묶인 채 내걸린 곳 역시 관덕정 광장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70여년 뒤 4·3의 완전 해결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제주4·3특별법 개정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같은 자리에서 열려 참석자들은 만세를 외치며 기뻐했다.

오늘날 관덕정 광장은 학생,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집회 장소가 돼 왔고, 각종 거리 행진을 하는 마지막 종착지가 되기도 했다.

관덕정은 이 모든 제주의 사건을 말없이 지켜봤다.
◇ 11차례 보수끝에 제모습 찾은 관덕정
관덕정은 제주성 안에 위치했던 조선시대의 수많은 전각 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문화재다.

오랜 세월 이어오는 동안 여러 위기를 맞기도 했다.

관덕정은 세종 30년 1448년 창건된 이후 1480년(성종 11), 1599년(명종 14), 1690년(숙종 16), 1753년(영조 29), 1779년(정조 2), 1833년(순조 33), 1850년(철종 1), 1882년(고종 19) 등 조선시대 8차례에 걸쳐 보수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본래의 모습이 크게 바뀌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24년 처마가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일본인들이 관덕정을 보수한다는 명목으로 15척(454.5㎝)이나 되던 긴 처마의 끝부분을 2척(60.6㎝) 가량 잘라버렸다.

주변 도로 위로 관덕정의 긴 처마가 넘어가 걸린다는 이유였다.
당시 일제는 관덕정만 훼손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제주의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제주목(濟州牧) 관아를 모두 헐어 조선인을 핍박하기 위한 경찰서, 법원 건물을 세웠다.

또 제주목관아와 민가를 보호하는 읍성(邑城) 역할을 했던 3.2㎞ 달하는 제주성곽을 대부분 헐어버렸다.

사실상 일제는 관덕정을 제외한 제주에 남은 조선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린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관덕정은 남아 해방을 맞았지만, 수난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해방 후 관덕정은 1948년 9월 제주도의 임시 도청으로, 1952년 도의회 의사당, 북제주 군청의 임시 청사 등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1956년에는 미공보원 상설 문화원으로 사용됐다.

1963년 보물 제322호로 지정됐지만, 1969년 보수 공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제주도가 문화재를 훼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중수 공사 당시 주위에 문을 달아 흰 페인트를 덧칠한 것이다.
개방형 공간이 폐쇄적 공간으로 바뀌면서 관덕정은 옛 모습과 위용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게다가 1960년대 초 관덕정 앞에 커다란 서양식 분수대와 야자수가 설치돼 하나 남은 조선의 목조건축의 품격을 떨어뜨렸다.

관덕정을 옛 모습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졌고, 복원은 서서히 진행됐다.

우선 1999년 분수대가 철거됐다.

이어 2003년 12월부터 11번째 보수 공사가 시작됐다.

관덕정을 전면 해체한 뒤 부식되거나 변형된 부분을 교체하고, 일제에 의해 훼손된 지붕을 복원했다.

또 관덕정 내부에 그려졌던 대수렵도, 십장생도, 적벽대첩도 등 8점의 벽화와 단청을 복원하고 구조 안전진단을 실시했다. 2006년 8월, 2년 넘게 이어진 공사 끝에 새로 태어난 관덕정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