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A 마스터스급 그린스피드…박인비도 인정한 '유리알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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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그니처 홀'골프는 체력보다는 정신력이 승패를 가르는 대표적인 스포츠로 꼽힌다. 하지만 딱 두 사람이 맞붙는 ‘매치 플레이’ 방식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14) 춘천 라데나GC
가든코스 9번홀(파5)
'역대 최장 연장전' 기록 나온 홀
2009년 두산매치플레이서
9차 연장 끝에 유소연 우승
'드라마 같은 승부' 매년 나오는 홀
긴 전장에 6개 벙커까지…
좌측 그린 기준 화이트티 503m
"티샷 감기면 100m 비치 벙커行
2온 어차피 힘드니 욕심 버려라"
준결승과 결승을 하루에 다 치르는 데다 연장 승부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아서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리 ‘강철 멘털’이라도 상대를 누르기 힘들다.2009년 5월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이 그랬다. 1990년에 태어난 동갑내기 유소연과 최혜용은 연장 9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결국 4m 버디를 낚은 유소연이 파에 그친 최혜용을 눌렀다.
당시 낮 12시8분에 시작한 둘의 대결은 오후 7시15분이 돼서야 끝났다. 오전 7시에 시작한 준결승전까지 포함해 이날 12시간 넘게 골프채를 휘두른 두 사람은 경기가 끝난 뒤 서로를 끌어안으며 울었다. 다리가 풀렸는지 두 사람은 휘청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9차례 연장전은 모두 한 홀에서 열렸다. 주인공은 강원 춘천 라데나GC의 시그니처홀인 가든코스 9번홀(파5). 굿샷에 대한 보상과 미스샷에 대한 응징이 확실한 홀이다. 일단 길다. 블루티 528m, 화이트티 503m, 레이디티 425m다. 모두 좌 그린 기준. 라데나GC는 모든 홀에 그린이 두 개씩 있는 ‘투 그린’ 홀로 이뤄져 있다. 대회 때는 전장이 다소 짧은 우 그린을 쓰는데, 그래도 블루 티 513m, 화이트 티 488m, 레드 티가 410m에 이른다. 코스 왼쪽에는 100m 이상 쭉 뻗은 ‘비치 벙커’와 해저드가 도사리고 있다.이렇게 ‘살벌한’ 홀을 만난 건 17개 홀을 돌면서 몸과 마음에 큰 ‘상처’가 난 뒤였다. 18번 홀로 배치된 시그니처홀의 티잉 에어리어에 서자 위압감부터 느껴졌다.
B J 싱도 다녀간 춘천의 명문
기자가 찾은 날 깃대는 좌측 그린에 꽂혀 있었다. 문희종 라데나GC 대표는 “내로라하는 ‘거포’가 아니면 2온은 힘들다. 세게 치려다 당겨지면 공이 비치 벙커나 해저드에 들어간다. 3온을 노리는 게 좋다”고 했다. 욕심을 버리니 결과가 좋았다. 스위트스폿에 맞은 공은 페어웨이 한가운데 떨어졌다. 거리를 제법 냈다고 생각했는데, 캐디는 “300m 남았으니 아이언으로 끊어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27홀 규모의 라데나GC는 춘천을 대표하는 명문 골프장으로 꼽힌다. 대기업(두산그룹) 산하 골프장답게 잔디 관리는 물론 각종 서비스도 나무랄 데 없다. 그 덕분에 1995년부터 남자골프대회 ‘패스포트 오픈’을 열었고, 2007년부터는 여자골프대회 두산 매치플레이 장소로 쓰이고 있다.1995년 패스포트 오픈 우승자는 당시 타이거 우즈의 라이벌이었던 ‘검은 진주’ B J 싱이었다.
1990년 춘천CC로 문을 연 이 골프장의 밑그림을 그린 이는 남촌CC, 자유CC 등을 설계한 김명길 씨다. 라데나GC로 이름을 바꾼 건 2007년이었다. 라데나는 레이크(Lake) 코스의 ‘La’, 가든(Garden) 코스의 ‘de’, 네이처(Nature) 코스의 ‘Na’에서 따왔다.
세컨드 샷을 칠 때 왼쪽 비치 벙커와 해저드를 너무 신경썼나 보다. 생각보다 더 오른쪽으로 밀렸고, 공은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몰랐던 벙커에 빠졌다. 문 대표는 “이 골프장에 81개의 벙커가 있는데, 그중 6개가 이 홀에 있다”며 “미스 샷에 대한 페널티가 가장 확실한 홀”이라고 했다. 레이업으로 공을 꺼낸 뒤 네 번째 샷으로 공을 그린에 올렸다. 공은 홀에서 약 5m 지점에 멈춰섰다.
박인비도 인정한 유리알 그린
평소 같으면 파를 낚기 위해 공이 홀을 지나치도록 쳤을 터. 하지만 용기가 안 났다. 앞선 17개 홀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이날 캐디가 불러준 그린 스피드(스팀프미터 기준)는 3.1m였지만, 체감 스피드는 3.5m 이상이었다.라데나GC는 ‘유리알 그린’을 경험할 수 있는 국내 몇 안 되는 골프장이다. 잔디 잎을 빳빳하게 세운 뒤 깎기를 반복해서 얻은 결과다. ‘투 그린’ 시스템인 덕분에 홀마다 쓰지 않은 그린 하나를 정성스레 관리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유리알 그린의 원조로 불리는 미국프로골프(PGA) 메이저대회 마스터스 수준인 4.0m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한다. 실제 두산매치플레이가 열린 첫해 그린 스피드는 4.2m였다. 당시 “그린스피드가 너무 빨라 경기 진행에 차질이 생길 정도”란 지적이 일자 속도를 4.0m 이하로 낮췄다고.
문 대표는 “박인비 선수도 라데나의 그린에는 엄지를 치켜세웠다”며 “평소 주말 골퍼들을 위해 3m대 초반으로 스피드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다들 어렵다고 한다”고 웃었다. 앞선 홀에서 ‘미친 스피드’를 경험해 다른 골프장의 절반 힘으로 스트로크했다. 홀 1m 앞에 멈춘 공을 넣지 못했다. 투 퍼트.그래도 이렇게 어려운 홀에서 보기를 했으니 만족스러웠다. 노련한 캐디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덕분이었다. 코스를 꿰뚫고 있는 베테랑 캐디가 배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건 라데나GC의 강점 중 하나다. 캐디 관리에 힘써온 덕분에 이직률이 낮은 편이라고 한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