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돋보기](29) 고인돌 속 선조들의 발자취…강화역사박물관

강화도 북부에 170여기 분포해 2000년 유네스크 세계유산 등재
[※편집자 주 = 인천은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국내에서 신문물을 처음 맞이하는 관문 도시 역할을 했습니다. 인천에서 시작된 '한국 최초'의 유산만 보더라도 철도·등대·서양식 호텔·공립 도서관·고속도로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연합뉴스 인천취재본부는 이처럼 인천의 역사와 정체성이 서린 박물관·전시관을 생생하고 다양하게 소개하려 합니다.

모두 30편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 기사는 매주 토요일 1편씩 송고됩니다. ]
우리나라 선사시대 대표 유적인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진 형태가 특징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수직선에서 오른쪽으로 15도가량 기울어져 있지만, 무너지지 않고 수천 년이 지난 현재까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언뜻 무너질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벽에 가까운 균형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

이 고인돌은 보는 이들에게 '문자도 없던 고대 선조들이 어떻게 건축과 관련된 기술과 지혜를 후대에 전하고 활용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 동북아 최대 규모 탁자식 고인돌 유적…기능 놓고 의견 분분
사적으로 지정된 강화 부근리 고인돌의 건축 연대는 3천여 년 전 청동기시대로 추정된다. 받침돌(굄돌) 2개(가로 4.6m·세로 1.5m·폭 0.8m) 위에 덮개돌(가로 6.5m·세로 5.2m·폭 1.4m)이 놓여 있는 형태로, 탁자를 닮아 '탁자식 고인돌'에 속한다.

같은 형태의 단일 고인돌 중에서는 동북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받침돌들이 모두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덮개돌은 왼쪽 아래로 기울어져 얹혀 있는데 오늘날까지 기울기 변화는 없는 것으로 분석된다.

학계는 당시 선조들이 돌들을 잘 짜 맞춰 균형을 잡는 기술을 가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받침돌 위쪽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 덮개돌을 잘 떠받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 건축 기법 중에는 울퉁불퉁한 주춧돌 위에 나무기둥을 세울 때 기둥 밑단을 깎아 돌에 맞추는 '그렝이법'이 있는데 부근리 고인돌에도 비슷한 기법이 사용됐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추정이다.

인력이 유일했던 당시 무거운 덮개돌을 받침돌 위에 올리는 과정에 대한 추정도 흥미롭다.

선조들은 받침돌을 먼저 세우고 일대를 흙으로 메워 언덕을 만들었다.

이어 언덕에 롤러 역할을 하는 통나무를 깐 뒤 덮개돌을 밧줄로 묶어 정상으로 끌어올렸다.

이후에는 받침돌이 드러나게끔 흙을 파냈다.

해당 덮개돌은 무게가 55t에 달하는데 100㎏당 성인 1명의 인력이 투입됐다고 가정하면 550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고인돌을 만든 집단의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구혜영 강화군 학예연구사는 28일 "고인돌은 기본적으로 대부분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근리 고인돌은 규모가 커 당시 상징적인 기념물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고인돌의 기능에 대한 견해는 아직도 학계에서 분분하다"고 설명했다.
◇ 선사시대 생활상 간직한 강화 고인돌…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부근리 고인돌을 포함한 강화 고인돌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닌다.

총 170여 기의 고인돌이 강화도 북부에 분포돼 있는데 이 중 100여 기는 산기슭에, 60여 기는 산마루나 능선에, 10여 기는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산기슭에서 많은 고인돌이 발견된 것이 매우 특이한 점인데 이는 당시 이곳 선조들이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 어디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평지 고인돌들은 해발 20∼30m에 있는데 그간 간척으로 인한 해안선 변화를 고려하면 청동기시대에는 바닷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이런 분석대로라면 당시 선조들은 물을 가까이하며 농경사회를 이루거나 어업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 고인돌의 또 다른 특징은 한 곳에 여러 기가 모여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선조들이 고인돌 건축 자리를 미리 골랐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장례와 제사를 지내는 장제(葬制) 문화를 이뤘다고도 볼 수 있다.

강화 고인돌에서 발견된 팽이형토기·돌창·바퀴날도끼 등 서북한 지역 유물은 당시 강화도와 서북한 지역 사이에 교류 활동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강화 고인돌에는 선사시대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흔적들이 많다.

강화 고인돌의 이 같은 역사적 의미가 널리 알려지면서 유네스코는 2000년 전북 고창·전남 화순 고인돌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 선사시대∼근대 강화도 역사를 한눈에…연간 18만명 찾는 명소
부근리 고인돌 인근에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연면적 4천233㎡·지하 1층∼지상 2층)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의 강화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박물관은 강화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보존·연구하기 위해 2010년 설립됐다.

연평균 관람객은 18만여 명이다.

지난해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6만여 명이 다녀갔다.

이곳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시대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으며 삼국·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와 근대까지 강화도에서 벌어진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도 글과 사진 등을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전시실에서는 주먹도끼·빗살무늬 토기·돌칼 등의 유물들을 접할 수 있고 고인돌의 건축 과정을 재현한 모형들은 이곳에서 빼놓지 말고 꼭 관람해야 하는 전시물로 꼽힌다.

박물관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오후 6시 운영되며 입장료는 어린이·청소년·군인 2천원, 성인 3천원이다. 6세 이하 아동과 65세 이상 노인은 무료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