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강진 한달] ③ '21세기 술탄' 에르도안, 대선 목전서 집권20년 최대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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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대응 실패·건설부패 노출·고물가-리라화 폭락, 겹악재에 성난 민심 분출
흔들리는 종신집권의 꿈, 5월14일 조기 대선 강행 승부수…정치인생 '기로'
20년전 지진 '실정론' 힘입어 집권, 이번엔 지진으로 대선가도 흔들…'역사의 아이러니' 21세기 최악의 재난 중 하나로 기록될 이번 지진으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일각의 연기론에도 불구, 예정대로 오는 5월 14일 조기 대선을 통해 30년 초장기 집권에 도전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지진 초기 대응 실패 논란과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대선가도에 메가톤급 악재를 만났다.
'21세기 술탄'으로 불리며 장기집권, 나아가 종신집권의 꿈을 꿨던 그로선 벼랑 끝으로 내몰리며 정치 인생 최대 시험대에 오르게 된 셈이다. 2002년 정의개발당의 총선 승리와 2003년 총리 취임 등 에르도안 대통령의 집권이 상당 부분 1999년 이즈미트 지진에 편승한 결과라면, 이번 대재앙은 20년 그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 심판론 불 댕긴 초기대응 실패…'전제적이지만 강력' 이미지 치명상
이번 지진이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가장 큰 위기가 된 이유는 자신의 통치 스타일의 약점이 드러났다는 점 때문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7년 대통령 중심제 개헌 이후 권력기관들을 중앙 집권화해 제왕적 권력을 구축했으나, 이번 재난에서 대응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야당은 정부 기관들이 신속하게 판단하고 움직이는 대신 상부 결정만 기다리며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맹폭했다.
실제로 1999년 지진 당시 신속히 배치됐던 군이 이번 지진에는 이틀이 지나서야 투입되기도 했다.
지진 대응 기능을 적신월사 등 전문기관이 아니라 재난관리청(AFAD)으로 이관하고 자기 사람으로 자리를 채운 결과 관련 역량이 저하됐다는 분석도 있다.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 케말 클르츠다로울루 대표는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들의 무능력이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정부 인력과 장비의 도착이 늦어지는 동안 민간 자원봉사자들이 맨손으로 구조에 나섰지만 이마저 방해받기도 했다.
술레이만 소을루 내무장관은 록스타 할루크 레벤트와 야권 지자체가 파견한 구조대를 겨냥해 "국가와 경쟁하려는 이들에 대해선 필요한 조처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에르도안 대통령 본인도 피해 지역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큰 재난에 준비돼 있기는 불가능하다"는 등 책임 회피성 발언을 하면서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는 이후 "너무 많은 건물이 파손돼 불운하게도 우리가 원하는 만큼 신속하게 개입할 수 없었다"며 뒤늦게 책임을 인정해야 했다.
에르도안 정권은 부실 시공 관련자에 대한 무더기 구속과 '공포 조성' 혐의를 빌미로 한 대규모 체포 작전 등을 통해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책임론 회피라는 시선 속에 심판론의 불길은 쉽사리 잡히지 않는 상태다.
소네르 차압타이 워싱턴극동연구소 터키연구국장은 "이번 지진이 '강력하고 전제적이지만 효율적'이라는 에르도안의 이미지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 모래성 위 고속성장…지진에 위기 가속화 우려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기 고속 성장이라는 치적이 사실은 대규모 부실공사로 쌓은 모래성이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튀르키예 국내총생산(GDP)은 최근 수년간 침체에도 불구하고 에르도안 대통령이 총리로 취임한 2003년 3천146억 달러에서 2013년 9천578억 달러로 10년간 3배가량 급성장했다.
이 같은 성장의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이 건설 산업으로, 정부는 대규모 부동산 개발을 촉진하고 각종 규제와 인허가 절차를 완화했다.
에르도안 가문의 뿌리이자 이번 지진의 진앙인 가지안테프 역시 이런 개발 붐의 수혜를 입은 대표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노후한 건물뿐만 아니라 내진 설계가 의무화된 후 지어진 건물까지 대거 무너지면서 무분별한 개발 정책뿐만 아니라 고질적 인허가 비리까지 여론의 도마에 오르게 됐다.
1999년 이즈미트 지진 후 도입돼 20년 넘게 징수한 지진세의 용처도 쟁점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징수한 지진세가 총 6조 원에,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40조 원이 넘는다는 추산이 나오지만 규모나 용처는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지진 발생이 잦은 튀르키예 상황을 고려하면 이 같은 건축 및 재난 관련 행정 난맥상은 유권자들에게 특히 민감한 문제일 수 있다.
또한 이번 지진은 최근 초고물가와 리라화 폭락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을 최악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2021년 11.4%에 달했던 경제 성장률은 지난해 5.6%로 낮아진 데 이어 올해는 2.8%로 반토막 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이번 지진으로 인해 성장률이 최대 2%포인트 낮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 5·14 조기선거 강행, 정면돌파 시도…'산전수전' 20년 집권 경험으로 파고 넘나
이번 대지진으로 불거진 초대형 악재에도 불구, 20년 넘게 각종 자연재해는 물론 쿠데타 위기와 숱한 스캔들을 이겨낸 노련한 '스트롱맨'이 결국 이번 고비도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없지 않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 속에 튀르키예 수사당국은 건물 부실시공 관련자 184명을 구속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구속된 이들 중에는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AKP) 출신 오케슈 카바크 가지안테프주 누르다으 시장도 있다.
경찰 역시 지진과 관련해 공포와 공황을 조장한 혐의로 78명을 체포하고 20명을 구속하며 비판 여론 차단에 나섰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율도 일면 침체를 벗어나는 분위기다.
아레다 서베이가 지난달 23~27일 3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지율 49.8%로 21.7%에 그친 클르츠다로울루 CHP 대표를 2배 넘게 앞질렀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야권 주자들과 가상 대결에서 대부분 패한 것과는 크게 달라진 결과다.
에르도안 대통령도 한때 연기설에 제기됐던 대통령 선거를 예정대로 5월 14일에 치르겠다며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1999년 1만7천여 명이 숨진 이즈미트 지진 이후 정부에 대한 분노를 등에 업고 2003년 총리로 취임한 그는 이번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임기 중 조기 선거를 통해 2033년까지 30년 집권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지진으로 흥한 자, 지진으로 망한다'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현실화될 수 있는 상황이다. 지진 후 3개월여 만에 치러지는 이번 대선은 정부의 지진 대응이 당락을 가를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를 둘러싼 에르도안 대통령과 도전자들의 공방이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연합뉴스
흔들리는 종신집권의 꿈, 5월14일 조기 대선 강행 승부수…정치인생 '기로'
20년전 지진 '실정론' 힘입어 집권, 이번엔 지진으로 대선가도 흔들…'역사의 아이러니' 21세기 최악의 재난 중 하나로 기록될 이번 지진으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일각의 연기론에도 불구, 예정대로 오는 5월 14일 조기 대선을 통해 30년 초장기 집권에 도전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지진 초기 대응 실패 논란과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대선가도에 메가톤급 악재를 만났다.
'21세기 술탄'으로 불리며 장기집권, 나아가 종신집권의 꿈을 꿨던 그로선 벼랑 끝으로 내몰리며 정치 인생 최대 시험대에 오르게 된 셈이다. 2002년 정의개발당의 총선 승리와 2003년 총리 취임 등 에르도안 대통령의 집권이 상당 부분 1999년 이즈미트 지진에 편승한 결과라면, 이번 대재앙은 20년 그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 심판론 불 댕긴 초기대응 실패…'전제적이지만 강력' 이미지 치명상
이번 지진이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가장 큰 위기가 된 이유는 자신의 통치 스타일의 약점이 드러났다는 점 때문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7년 대통령 중심제 개헌 이후 권력기관들을 중앙 집권화해 제왕적 권력을 구축했으나, 이번 재난에서 대응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야당은 정부 기관들이 신속하게 판단하고 움직이는 대신 상부 결정만 기다리며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맹폭했다.
실제로 1999년 지진 당시 신속히 배치됐던 군이 이번 지진에는 이틀이 지나서야 투입되기도 했다.
지진 대응 기능을 적신월사 등 전문기관이 아니라 재난관리청(AFAD)으로 이관하고 자기 사람으로 자리를 채운 결과 관련 역량이 저하됐다는 분석도 있다.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 케말 클르츠다로울루 대표는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들의 무능력이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정부 인력과 장비의 도착이 늦어지는 동안 민간 자원봉사자들이 맨손으로 구조에 나섰지만 이마저 방해받기도 했다.
술레이만 소을루 내무장관은 록스타 할루크 레벤트와 야권 지자체가 파견한 구조대를 겨냥해 "국가와 경쟁하려는 이들에 대해선 필요한 조처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에르도안 대통령 본인도 피해 지역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큰 재난에 준비돼 있기는 불가능하다"는 등 책임 회피성 발언을 하면서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는 이후 "너무 많은 건물이 파손돼 불운하게도 우리가 원하는 만큼 신속하게 개입할 수 없었다"며 뒤늦게 책임을 인정해야 했다.
에르도안 정권은 부실 시공 관련자에 대한 무더기 구속과 '공포 조성' 혐의를 빌미로 한 대규모 체포 작전 등을 통해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책임론 회피라는 시선 속에 심판론의 불길은 쉽사리 잡히지 않는 상태다.
소네르 차압타이 워싱턴극동연구소 터키연구국장은 "이번 지진이 '강력하고 전제적이지만 효율적'이라는 에르도안의 이미지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 모래성 위 고속성장…지진에 위기 가속화 우려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기 고속 성장이라는 치적이 사실은 대규모 부실공사로 쌓은 모래성이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튀르키예 국내총생산(GDP)은 최근 수년간 침체에도 불구하고 에르도안 대통령이 총리로 취임한 2003년 3천146억 달러에서 2013년 9천578억 달러로 10년간 3배가량 급성장했다.
이 같은 성장의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이 건설 산업으로, 정부는 대규모 부동산 개발을 촉진하고 각종 규제와 인허가 절차를 완화했다.
에르도안 가문의 뿌리이자 이번 지진의 진앙인 가지안테프 역시 이런 개발 붐의 수혜를 입은 대표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노후한 건물뿐만 아니라 내진 설계가 의무화된 후 지어진 건물까지 대거 무너지면서 무분별한 개발 정책뿐만 아니라 고질적 인허가 비리까지 여론의 도마에 오르게 됐다.
1999년 이즈미트 지진 후 도입돼 20년 넘게 징수한 지진세의 용처도 쟁점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징수한 지진세가 총 6조 원에,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40조 원이 넘는다는 추산이 나오지만 규모나 용처는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지진 발생이 잦은 튀르키예 상황을 고려하면 이 같은 건축 및 재난 관련 행정 난맥상은 유권자들에게 특히 민감한 문제일 수 있다.
또한 이번 지진은 최근 초고물가와 리라화 폭락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을 최악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2021년 11.4%에 달했던 경제 성장률은 지난해 5.6%로 낮아진 데 이어 올해는 2.8%로 반토막 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이번 지진으로 인해 성장률이 최대 2%포인트 낮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 5·14 조기선거 강행, 정면돌파 시도…'산전수전' 20년 집권 경험으로 파고 넘나
이번 대지진으로 불거진 초대형 악재에도 불구, 20년 넘게 각종 자연재해는 물론 쿠데타 위기와 숱한 스캔들을 이겨낸 노련한 '스트롱맨'이 결국 이번 고비도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없지 않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 속에 튀르키예 수사당국은 건물 부실시공 관련자 184명을 구속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구속된 이들 중에는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AKP) 출신 오케슈 카바크 가지안테프주 누르다으 시장도 있다.
경찰 역시 지진과 관련해 공포와 공황을 조장한 혐의로 78명을 체포하고 20명을 구속하며 비판 여론 차단에 나섰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율도 일면 침체를 벗어나는 분위기다.
아레다 서베이가 지난달 23~27일 3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지율 49.8%로 21.7%에 그친 클르츠다로울루 CHP 대표를 2배 넘게 앞질렀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야권 주자들과 가상 대결에서 대부분 패한 것과는 크게 달라진 결과다.
에르도안 대통령도 한때 연기설에 제기됐던 대통령 선거를 예정대로 5월 14일에 치르겠다며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1999년 1만7천여 명이 숨진 이즈미트 지진 이후 정부에 대한 분노를 등에 업고 2003년 총리로 취임한 그는 이번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임기 중 조기 선거를 통해 2033년까지 30년 집권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지진으로 흥한 자, 지진으로 망한다'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현실화될 수 있는 상황이다. 지진 후 3개월여 만에 치러지는 이번 대선은 정부의 지진 대응이 당락을 가를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를 둘러싼 에르도안 대통령과 도전자들의 공방이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