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으로 풀어낸 '트로이의 여인들' 英 에든버러 울리다

세계 최대 공연축제서 호평

모든 대사와 노래 한국어지만
恨 정서 공감하며 "브라보" 환호

대극장 매진…거리 곳곳 포스터
가디언, 별 다섯개 주며 "꼭 봐라"

韓, 손열음 등 역대 최다 EIF 참가
지난 9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 무대에 오른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국립창극단원 김금미가 헤큐바를 연기하고 있다. /EIF 제공
지난 9일 저녁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페스티벌 시어터. 매년 8월 열리는 세계 최대 공연축제인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의 핵심 공연장인 이곳은 이날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다들 한국에서 건너온 ‘창극’(창을 기본으로 하는 한국 고유의 음악극)을 보기 위해 찾은 서양 관객이었다. 현지 유력 신문인 가디언이 ‘꼭 봐야 할 공연’ 목록에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을 올린 데다 주최 측이 에든버러 시내 곳곳에 대형 포스터를 붙이는 등 간판 프로그램으로 홍보한 덕분이다.두 시간에 걸친 창극이 막을 내리자 객석 여기저기서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커튼콜 땐 5분 넘게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눈물을 훔치는 관객도 여럿 보였다. 관객들의 입에선 “환상적이다(fantastic)” “힘이 넘친다(powerful)”는 단어들이 쏟아졌다. 전문가들도 그렇게 봤다. 가디언은 “시작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는 공연”이라며 별 다섯 개를 줬다. 현지 문화전문 매체 리스트도 별 다섯 개와 함께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찬 비극이 에든버러를 크게 울렸다”고 썼다.

○올해 EIF 최대 화제작

지난 9일 ‘트로이의 여인들’을 찾은 관객들이 공연이 끝난 뒤 기립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트로이의 여인들’은 올해 EIF를 가장 밝게 빛낸 주인공 중 하나였다. 이 기간 전 세계에서 에든버러로 날아든 공연만 300개에 이르는데, 특정 공연이 메인 공연장의 골든 타임을 사흘 내내 잡은 것도 그렇고, 그 좌석을 매일 꽉꽉 채운 것도 그렇다. 유은선 국립창극단장 겸 예술감독은 “가장 서양적인 스토리를 가장 동양적인 형식으로 풀어낸 것만으로도 현지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고 말했다.2016년 국내에서 초연한 이 창극은 트로이 전쟁에서 패배해 성노예로 끌려간 헤큐바,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헬레네 등 고통받은 여성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그리스의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배삼식 작가가 극본을 쓰고, 싱가포르 예술축제 예술감독이자 세계적 연출가 옹켄센이 연출을 맡았다. 여기에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의 음악을 담당한 작곡가 정재일이 음악감독을,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담당했다. 이렇게 ‘드림팀’이 만든 창극은 맛깔 나는 연출과 판소리 특유의 절절한 노래가 어우러져 한국은 물론 미국 오스트리아 싱가포르 네덜란드에서도 호평받았다.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날 에든버러에서도 그랬다. 가사는 물론 대사도 전부 한국어였지만, 현지 관객들은 ‘한(恨)’이 담긴 소리와 연기를 무리 없이 따라갔다. 트로이의 왕비 헤큐바(김금미 분)가 신들을 향해 분노하며 소리를 내뱉는 장면에선 객석 전체가 숨을 죽였다. 전쟁의 원인이 된 아름다운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 역으로 남자배우 김준수가 등장할 땐 놀라움이 담긴 탄식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대금 아쟁 등 전통 악기들은 ‘주연 같은 조연’이었다.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공주 카산드라가 등장할 땐 대금이, 안드로마케가 갓난아이를 잃은 장면에선 아쟁이 배우들의 노래를 받쳐줬다. 단출한 무대는 오히려 관객들이 소리에 집중하도록 했다. 극장에서 만난 로이 럭스포드 EIF 총괄프로듀서는 “서양문화의 정수인 그리스 신화를 한국 전통 음악으로 표현한 것 자체가 너무나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국내 공연팀 역대 최다 초청

EIF는 올해 75주년을 맞은 세계 최대 공연 축제다.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상처받은 시민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 오페라, 연극, 무용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을 ‘직관’하기 위해 매년 수백만 명이 에든버러에 들른다. 이달 4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 올해 EIF엔 48개국에서 온 2000여 명의 아티스트가 295개 공연을 선보인다.

올해 EIF에선 한국 지분이 크게 늘었다. 한·영 수교 140주년을 맞아 문화체육관광부 및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주영한국문화원 등과 협업해 아예 ‘코리아 시즌’이란 작은 페스티벌을 마련했다. 국립창극단뿐 아니라 KBS교향악단과 현악 4중주단 노부스콰르텟, 피아니스트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등도 영국행(行) 비행기에 올랐다. 역대 최대 규모다. 선승혜 주영한국문화원장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덕분”이라고 했다.

지난 8일 코리아 시즌의 문을 연 노부스콰르텟은 앙코르 곡으로 ‘아리랑’을 연주해 주목받았다. 스코틀랜드 최대 언론 스코츠맨은 “연주자 네 명의 개성과 전체적인 조화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 공연”이라고 평했다. KBS교향악단은 11일 어셔홀에서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을 연주했다.

에든버러=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