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스토리텔링 넘쳐도 자기 이야기 실종"…'서사의 위기'

"오늘날은 스토리텔링이 넘침에도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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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저서 '피로사회'에서 현대사회의 성과주의를 비판했던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휘발성 강한 이슈를 좇느라 자기만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현시대를 고발한다. 그는 최근 번역 출간된 '서사의 위기'에서 소셜미디어(SNS)에 예속되고 과잉된 정보에 휩쓸리며 공허해진 현대인의 삶을 "서사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그간 '피로사회'와 '투명사회', '고통 없는 사회' 등의 저서에서 사회 병리적 현상을 예리한 시각으로 파헤친 저자가 새 책에서 관심을 둔 키워드는 스토리와 서사다.

저자는 현대인이 스토리에 중독됐다고 화두를 던진다. 그에 따르면 스토리는 끊임없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뉴스와 정보이며 삶의 방향이나 의미를 제시하지 못한다.

이와 달리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라고 규정한다.

정보의 쓰나미는 서사의 위기를 악화시킨다. 그는 올해 2월 출간한 '정보의 지배'에서도 "정보사회의 역설은 사람들이 정보 안에 갇힌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보 사냥꾼이 된 현대인은 삶의 주체가 아닌, 상품의 소비자로 전락하기 쉽다.

요즘 기업의 마케팅 등 여러 영역에서 스토리텔링이 인기다. 기업은 가치 없는 사물에 스토리를 더해 구매를 부추긴다.

저자는 이를 '스토리셀링'이라고 칭한다.

그는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된다며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현대인은 자기 삶마저 SNS에 게시하며 스토리셀링 한다.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 재빨리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는 타인의 '좋아요'를 기다린다.

내면의 감흥을 온전히 느끼기보다 자기를 정보화하는데 더 익숙하다.

저자는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부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음,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른 척한다"며 "셀카는 텅 빈 자기의 복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삶, 즉 서사의 회복을 강조한다.

그 방법으로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를 예로 들며 '경청'을 제안한다.

소설 속 어린 소녀 모모는 사려 깊은 침묵으로 모든 타자가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내도록 배려한다.

이야기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저자는 "경청은 상대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이야기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소중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사랑받는다고까지 느끼는 공명의 공간을 연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대인에게 자기만의 서사가 왜 중요한지 이같이 되짚는다.

"삶은 이야기"이고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으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다산초당. 최지수 옮김. 144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