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윤발이 유행시킨 트렌치코트…영국군 우비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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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인문학트렌치코트. ‘지구 온난화의 폐해’ ‘남녀의 양육 책임의 한계와 허용 범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워라밸의 균형감’ ‘우울증과 노출증 같은 현대 사회의 정신적 감정적 질병’…. 패션 칼럼에서 거론하기엔 너무나도 심각하고 진지한 이 주제들을 트렌치코트를 다루며 생각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탁월한 방수성은 물론 스타일 측면에서도 인정받아 민간에서 큰 인기를 끌어 고안된 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트렌치코트. 이 의미심장하고 중차대한 옷은 살아남아 사랑받은 기간만큼이나 깊고도 다양한 화두를 던진다.
'간절기 필수템' 트렌치코트
"물에 안 젖는 코트 만들어달라"
영국軍 요청으로 200년 전 개발
1차 대전 참호전투 때 군인들이 입어
땀 안마르는 단점, 버버리가 보완
방수성에 통기성도 확보되자 대중화
어깨 견장은 '군인들 계급장' 부착용
트렌치코트가 던지는 화두들
가장 먼저 대두된 질문,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폐해는 무엇일까. 심각하고도 무시무시한 거시적인 이야기들이 100만 가지쯤 쏟아지겠지만 절절한 옷 애호가(라고 쓰고 옷 환자라고 읽는다)인 필자에겐 트렌치코트를 입을 날이 줄어든다는 매우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폐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렌치코트를 입을 결심’을 위해 용기 내는 분들이 있으리라. 오래전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던 험프리 보가트처럼 근사하게 연출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트렌치코트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트렌치코트 탄생에 관한 오해
많은 이가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트렌치코트는 원래부터 군용 장비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트렌치라는 영단어가 쏟아지는 포화로부터 몸을 숨기는 전쟁용 참호를 일컫는 표현이니 응당 참호전을 위해 개발된 옷이리라 추정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미 만들어진 옷이 군복에 적용되면서 점진적으로 필요에 의해 변화·발전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1차 대전이 일어나기 거의 100년 전인 1800년대 초 찰스 매킨토시는 방수 코트를 개발하라는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면 원단을 고무로 코팅한 최초의 방수 원단을 개발하고 이를 코트에 적용한다. 방수라는 획기적인 기능을 담은 코트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동시에 땀과 열기도 고스란히 가뒀으니 날이라도 더워지면 견딜 수 없는 냄새를 풍길 뿐 아니라 고무가 더운 열기에 녹아내리며 활용성이 현저히 떨어져 외면받는다.통기성을 확보하면서 방수가 되는 소재를 향한 연구가 이어지는데 1853년 존 에머리는 훨씬 더 통기성이 좋은 소재를 개발하고 특허를 출원한다. 그리고 이를 활용한 코트 브랜드를 아쿠아스큐텀(Acuascutum, 라틴어로 방수)으로 정한다. 시간이 흘러 1879년 토머스 버버리 역시 개버딘이라는 원단을 개발하는데, 원단 전체가 아니라 개별 섬유 자체에 방수성을 부여해 직조한 트윌 원단으로 통기성을 확보하게 된다. 훨씬 쾌적한 비옷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버버리의 방수코트는 1901년 영국군에 보급됐고 1차대전 당시 전장에서 활용되며 오늘날 클래식 트렌치코트의 디테일이 더해진다. ‘바바리’라는 트렌치코트의 우리 식 별명도 버버리 브랜드에서 비롯됐다.더블브레스티드 디자인, 활동성을 보장하는 래글런 소매, 계급장을 부착할 견장, 소총 사격을 위한 어깨의 덧댐, 지도를 보관하는 주둥이가 달린 깊은 주머니, 허리 벨트와 도구를 부착하는 D모양 링, 소매 안으로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막는 소매의 여밈 등 전장의 예상치 못한 비는 물론 빗발치는 총알과 공포심으로부터 병사를 감싸 주던 디테일이 여태껏 살아남아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멋진 스타일을 완성했다.
트렌치코트가 빛낸 영화 속 캐릭터들
트렌치코트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주인공의 캐릭터를 대변하는 옷으로 등장하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앞서 언급한 험프리 보가트 같은 배우의 우수에 찬 사랑꾼 캐릭터뿐 아니라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의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도 많이 사용됐고, 이는 여전히 많은 패션 관계자에게 트렌치코트가 유행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소환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87년 저우룬파(周潤發)의 영화 ‘영웅본색’에서는 그야말로 그 본색을 드러냈다. 그 시절을 살던 이들 중에 기다란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성냥개비를 입에 물어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니 국내 의류산업에 미친 저우룬파의 영향도 상당했을 것이다.아쉽게도 이런 트렌치코트의 이미지는 결코 멋있고 아름답게만 여겨질 수 없었으니, 1999년 미국 콜로라도주 컬럼바인고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들이 기다란 코트에 무기를 숨겨 학교에 들여온 것을 계기로 한동안 미국 교교생들에겐 등교 시 트렌치코트 착용이 금지되기도 했었다. 트렌치코트의 스타일링으로 가장 인상적인 족적은 전형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을 만날 수 있는 미국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 새겨졌다. 1979년 당시 전성기를 누리며 열연을 통해 각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리프의 명품 연기가 돋보이는 가운데 전형적인 미국 뉴욕 맨해튼 도시인들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어 필자가 매우 사랑하는 영화다. 사뭇 다른 두 사람의 성격과 생각의 차이, 이혼 그리고 그로 인한 양육권 다툼이 다뤄진다. 오랜만에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아들을 만나는 메릴 스트리프의 단정한 트렌치코트와 바쁜 삶을 오가며 부지런히 아이를 돌보는 더스틴 호프만의 자유분방한 트렌치코트 스타일을 눈여겨보면 던져진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두 등장인물의 생각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트렌치코트에 이렇게나 많은 우리 모두의 이슈가 연결됐을 줄이야. 남녀를 통틀어 패션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여전히 그런 군복, 트렌치코트는 그 질긴 생명력만큼이나 많은 사회적, 감정적, 정신적 문제를 감싸거나 야기한 수단이자 원인이 돼왔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 지구 온난화로 더 이상 트렌치코트를 입지 못할 날이 오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트렌치코트의, 아니 우리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한국신사 이헌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