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억 후원금은 '넙죽'…팽당한 재일교포 올림픽기념비

1988년 동포들 모금 기린 비석
시간 지나자 곳곳 금가고 깨져

주민 "동포가족 종종 오던데…"
체육공단은 뒤늦게 "연내 보수"
관리 부실로 수개월째 방치된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재일동포 기념비.
“기념비 곳곳이 깨져 있는데, 몇 달 동안 방치 상태입니다. 재일동포 가족들이 종종 방문하곤 하던데….”(지역 주민 윤모씨)

19일 오전 찾은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회관 앞에 자리한 재일동포 기념비는 곳곳이 금 간 상태였고, 표면에도 깨진 자국이 뚜렷했다. 급히 이어 붙인 듯 접착제가 하얗게 들뜬 티도 났다.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모금 운동을 벌인 재일동포를 기리기 위해 2005년 건립된 ‘100억엔 성금 기념비’가 방치되고 있다. 기념비 건립 당시 정부는 “후원금을 주신 재외 동포들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그 후손들이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게 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20년도 채 되지 않아 약속이 무색해졌다는 지적이다.

이날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이 기념비는 88올림픽 개최 17년 후인 2005년 세워졌다. 비석엔 성금을 후원한 재일동포 개인과 단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후 20여 년이 흐른 현재 기념비는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2019년 올림픽회관 리모델링을 하면서 한 번 해체한 뒤 재설치한 게 원인이다. 이동·보관 과정에서 6개 비석 중 2개에 큰 크랙이 생겼다. 작년 12월께 기념비를 다시 설치하면서 기존 순서에 맞지 않게 뒤죽박죽 배치됐다는 주장도 나온다.재일동포들은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성금을 후원한 재단의 한 관계자는 “오랫동안 식민지 백성이나 2등 국민으로 멸시받으며 살아온 재일동포들이 모국에서 세계적인 경사가 벌어진다고 하니 모두가 내 집 잔치로 여기고 후원한 것”이라며 “당시 동포들의 정신을 기념하는 장소인데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재일동포들에게 88올림픽은 모국 발전의 상징이었다. 이들은 1981년 서울이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이듬해인 1982년 재일한국인후원회를 결성했다.

오사카흥은(大阪興銀) 이사장이던 이희건 신한은행 초대 회장이 후원회장을 맡아 모금을 이끌었고, 모금액은 100억엔을 넘겼다. 당시 환율로 540억원에 달했고, 건국 이후 최대 규모 성금으로 이목을 끌었다. 이 돈은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올림픽 수영경기장, 테니스경기장 등 5개 올림픽 시설을 짓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관리 주체인 국민체육진흥공단은 보수 계획을 묻는 질의에 “올 하반기까지 마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정과 예산 확보 계획 등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공단 관계자는 “재일동포들의 문의로 최근 관련 사항을 인지했다”며 “기념비의 순서를 본래대로 맞추고 비석을 복구하는 등 하루빨리 보수하겠다”고 말했다.

안정훈 기자 ajh632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