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한 테이블에 앉은 영국인과 중국인

빨리 바뀌고 빨리 잊는 시대에
나만의 사랑방을 만들려 한다

지중배 지휘자
얼마 전 손일훈 작곡가에게 그가 작곡한 ‘메디테이션 II’(Meditation II)에 세기말 감성이 담겨 있다는 말을 전했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느껴지는 것 같은 감성에 매료돼 자주 듣는다고도 했다.

21세기로 넘어가던 20여 년 전. 그 시절은 세기가 바뀌는 변화처럼 나도 10대에서 20대로,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때였다. 세기말을 겪고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며 입시를 마친 뒤 나는 그동안 못한 일을 시작했다. 많은 영화를 대여해 보며 울고 웃었다. 수북하게 빌려 온 책과 만화책을 나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어 반복해서 듣고 읽었다. 마마스앤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 가사처럼 하늘은 회색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본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중경삼림’. 봄이 찾아오기 전, 잿빛의 무거운 겨울날이었지만 이 영화는 그날의 하늘 모습과 공기의 냄새를 평생 기억하게 했다.경찰663(량차오웨이·梁朝偉)이 종이컵에 담긴 블랙커피를 외로이 마시는 모습에, 그런 량차오웨이가 마음에 조금씩 들어오는 점원 페이(왕페이)가 그를 알고 싶은 마음에 블랙커피를 마셔보는 장면을 접한 뒤 나도 처음으로 블랙커피를 마신 날이었다.

홍콩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간이음식점 ‘차찬텡’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들…. 간단한 음식을 빨리 먹는 곳, 숨 가쁜 일상의 상징인 차찬텡은 극 중 두 남녀에게는 시간이 멈춘 장소였다. 그리고 인연이 사라지고, 생기는 공간이었다. 누아르 영화의 배경일 뿐이던 홍콩은 그 장면들을 보면서 공허하지만 청춘과 사랑 그리고 신비로운 도시로 변화했다.

내가 음식을 좋아하는 이유, 그리고 그 음식을 서로 나누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음악과 같아서일 것이다. 음식과 음악은 극(劇)에서 의미 있는 매개체이고 중요한 장치 역할을 한다. 영화 중경삼림 속 음식들은 주인공인 남녀들의 공허한 심리를 보여주고, 그들 인연의 계기가 되며 그들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장치다. 그리고 이별의 음식이기도 하다.영화에 음식을 잘 사용하기로 이름난 왕자웨이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음식은 감정의 배출 창고 역할을 하고 남녀 간의 욕망을 대신하는 의미도 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음식과 음악을 즐기며 소통도 하지만 음식과 음악은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매개체 역할을 해왔다. 시대를 따라가며 서로의 문화가 뒤섞이며 새로운 음식과 음악으로 서로의 문화와 정서에 깊게 자리 잡곤 했다.

캘리포니아 드림을 꿈꾸는 왕페이와 연인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량차오웨이가 만나는 매개체인 차찬텡도 초기 식민지 시절 영국인과 한족이 서로 식사하며 소통하기 위한 장소였다고 한다. 그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며 변화가 생겼지만, 혼돈의 그 시절 그들은 서로 다른 음식을 공유하며 서로를 조금이나마 알아가려 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지나가던 손님을 사랑방에서 맞이하고 그 집의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손님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으며 스쳐 지나가는 인연 또한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화하고, 사람들은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시대. 바쁘게 살아오며 놓치며 살아온 듯해 나는 요즘 나만의 사랑방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업무로 만나는 식사 자리도 나의 사랑방 삼아 마음을 다해 상대방과 이야기하려고 한다. 리허설 때도, 연주 때도 음악을 음식 삼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공감하며 소통하려고 한다.

“한 번 만난 인연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을 뿐이다.”(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