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꾸밈도, 요란함도, 반성도 없다…메르켈 똑 닮은 메르켈 회고록
입력
수정
지면A19
자유2010년 2월 그리스를 시작으로 유로화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에게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말했다. “그리스에 필요한 건 돈입니다. 도와야 한다면 지금 도와야 합니다.” 메르켈은 답했다. “당연히 나도 돕고 싶습니다. 우린 모두 유로존의 일원이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돈은 절대 내놓을 수 없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베아테 바우만 지음
박종대 옮김
한길사 / 768쪽|3만8000원
<자유>는 메르켈 전 총리가 쓴 회고록이다. 최근 세계 32개국에 동시 출간됐다. 메르켈이 동독에서 산 35년과 통일 독일에서 지낸 35년의 삶을 돌아본다. 사람들이 메르켈 회고록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어린 시절, 젊은 시절보다는 총리로 재임한 16년간의 일이다. 그는 합리적이고 차분한 리더십으로 호평받았지만 되돌아보면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유로화 위기 상황이 악화할 대로 악화한 뒤에야 행동에 나섰고, 그것도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의 등에 떠밀려 마지못해 하는 모습이었다. 메르켈은 초저금리일 때도 균형 재정을 앞세워 인프라 투자를 하지 않아 독일의 기반 시설 개선 기회를 놓쳤다.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기로 하면서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높였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야욕을 알고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회고록에서 이런 실책에 대한 성찰은 잘 보이지 않는다. 몇 가지 사소한 실수는 인정하지만 대체로 자신의 주요 결정을 옹호한다. 예컨대 러시아 가스를 쓰지 않았다면 독일의 에너지 비용이 너무 비쌌을 것이라며 당시로선 최선의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회고록은 별다른 꾸밈이 없다. 반성도 없지만 업적을 요란하게 치장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메르켈을 드러낸다. 성숙하고 이성적인 지도자지만 답답한 원칙주의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경제에 관해선 이해도가 떨어지는 모습도 보인다. 한편으로 이는 메르켈 개인의 특성이라기보다 독일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메르켈은 자신의 결정이 독일 내부에서 어떤 반발을 불러올지 계속 신경 쓴다.700쪽이 넘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벌어진 많은 일을 다루기에 아주 상세하지는 않다. 여러 사건을 건조한 필체로 서술한다. 회고록도 메르켈을 닮았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