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여덟 살에 쓴 '사랑'이 내 작품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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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
여덟 살에 '사랑이란 어디 있나' 시 써
집필 과정 밝혀
"과거가 현재 돕고 있다고 느껴"
"장편소설 쓰기는 삶을 맞바꾸는 일
절실한 질문 속으로 들어가 머물러"
과 연결되는 작품 준비 중
국내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은 7일(현지시간)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수상 기념 강연을 이같은 시 구절로 시작했다. 1979년 여덟 살의 한강이 쓴 시다. 한강은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에 담긴 유년 시절 일기장 사이에서 이 시를 발견했다고 한다. 한강은 "일기장과 책자를 원래대로 구두 상자 안에 포개어 넣고 뚜껑을 덮기 전, 이 시가 적힌 면을 휴대폰으로 찍어뒀다"며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돼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강은 자신의 작품이 언제나 '사랑'을 향해 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란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다"며 "하지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고,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다"고 말했다. 한강은 "1979년 4월의 아이는 사랑은 '나의 심장'이란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썼고, 그 사랑의 정체에 대해선 '우리의 가슴과 가슴을 연결하는 금실'이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느끼는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며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에서 한강은 대표작 <소년이 온다>를 비롯해 자신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집필 과정 등을 밝혔다. 광주 망월동 묘지를 다녀온 뒤 한강은 "정면으로 광주(5·18 민주화 운동)를 다루는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한강은 "900여 명의 증언을 모은 책을 구해 한달에 걸쳐 매일 9시간씩 읽어 완독했다"며 "이후 장소와 시간대를 넓혀 인간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온 학살들에 대한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한강은 20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이같은 문장을 적었다고 한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던 중 1980년 5월 광주에서 희생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보고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은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며 "이따금 망월동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고 말했다. 이어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며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고 덧붙였다. 장편소설 쓰기에 특별한 매력과 애정을 느낀다고도 했다. 한강은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며 "바로 그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좋다"며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그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고 덧붙였다. 질문의 끝에 다다를 때가 바로 소설을 완성하는 시점이란 설명이다.
자전적 소설 <흰>과 연결되는 작품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이 소설은 태어난 지 두 시간만에 숨을 거둔 한강의 친언니였던 아기 이야기를 시작으로 삶과 죽음에 관한 성찰을 담은 작품이다. 한강은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내 삶을 잠시 빌려주려 했던,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흰>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이라며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문은 '귀로 듣는 문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작가들이 공을 들여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강 작가는 이날 약 30분에 걸쳐 미리 준비한 강연문을 한국어로 낭독했다. 강연 시작에 앞서 스웨덴 첼리스트 크리찬 라슨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5번 C단조를 연주하기도 했다. 한 작가의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 동영상은 한경닷컴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