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묵 블록버스터가 덕수궁 안으로…중국인도 놀란 국보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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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동양화의 위기’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게 1980년대다. 그 후 40여년이 흘렀다. 지금 미술이란 말을 들었을 때 수묵화부터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중 교류 수묵화 전시 '수묵별미'
중국 '국보급 그림' 5점 비롯
한중 작품 148점으로 느끼는 수묵의 맛
그렇다고 먹의 향기가 주는 매력까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별미로서의 동양화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짙고 옅은 먹빛만으로 험준한 산과 굽이치는 강, 아련한 물안개를 담아내는 수묵화의 여운은 번잡한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우아한 휴식을 준다. 아쉬운 건 이런 수묵화의 매력을 직접 느낄 기회가 드물다는 점. 절대 다수의 전시가 주류인 서양미술 위주기 때문이다.서울 정동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수묵별미’는 모처럼 수묵화를 한껏 감상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급 전시’다.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이해 기획한 이 전시에는 한국과 중국을 각각 대표하는 수묵채색화 총 148점(한국 74점, 중국 74점)이 나와 있다. 이번 전시의 핵심은 중국 수묵화. 우리나라로 치면 국보인 국가 1급 문물 5점을 비롯해 2급이 21점, 3급 작품 6점 등이 한자리에 나와 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32점에 달하는 중국 국가문물 회화가 국내에 소개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국보급 수묵화’의 향연
1층에 있는 중국화 1부 전시를 가장 주목할 만하다. 중국 국가문물들이 모두 모여 있는 전시관이다. 배원정 학예연구사는 “1급 문물 5점을 본 중국인 관람객들이 ‘어떻게 이런 작품들이 한국에 모였냐’고 놀랄 정도로 귀한 작품들”이라고 말했다.대표적인 작품이 치바이스의 수묵화 ‘연꽃과 원앙’이다. 치바이스는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며 2017년 경매에서 12폭 산수화가 9억3150만위안(약 1830억원)에 낙찰될 정도로 인기 높은 화가다. 1급 문물로 지정된 작품으로, 소박하고 순수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쉬베이훙의 ‘전마’도 중국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그림. 서양화의 사실주의를 중국화 전통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반영돼 있다는 설명이다. 우창숴의 ‘구슬 빛’, 우쭤런의 ‘고비사막 길’도 주목할 만한 1급 문물이다.
중국 역사의 아픈 점을 꼬집은 작품들이 함께 나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문화대혁명 시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지식인의 모습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라오빙슝의 ‘자조’가 특히 인상적이다. 항아리에 갇혔던 한 지식인이 항아리가 깨진 뒤 손발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모습을 그렸다. 소수민족 노인을 그린 리보안의 작품 '루좡 노인'도 마찬가지다. 격동의 중국 현대사 속 소수민족으로 겪어야 했던 삶의 굴곡이 노인의 얼굴에 주름살로 새겨져 있다. 반면 양즈광의 ‘광산의 새로운 일꾼’, 황안런의 ‘대지의 새로운 현’ 등은 체제 선전의 의도가 엿보이는 작품들이다. 중국화 2부에는 1990년대 이후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韓·中 수묵화의 ‘정반대 매력’한국 작품으로는 김기창, 박래현, 박생광, 허건 등 근대를 대표하는 수묵채색화가들의 대표작부터 현대 한국화가 황창배, 이종상, 유근택 등의 작품이 고루 나와 있다.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양국 현대 수묵화의 대조적인 특징이다. 예컨대 베이징화원 부원장인 모샤오쑹이 작년에 그린 ‘화실의 여유로운 정취 2’는 우리가 수묵화를 떠올릴 때 생각하는 전형적인 화풍을 띠고 있다. 반면 한국화가 이진주가 올해 그린 ‘볼 수 있는 21’은 광목에 수채물감을 쓰는 등 동양적인 재료와 기법을 썼지만 서양화로 착각할 만큼 색이 선명하고 사실적이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같은 시대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전혀 느낌이 다르다.이런 차이는 지난 수십년 간 생겨난 것이다. 중국은 전통 수묵 양식을 지키며 이를 고도화하는 데 힘썼다. 권위주의 정부는 ‘전통의 맥을 잇는 미술’을 적극 장려하면서 화가들은 ‘중국적인 아름다움’을 확고한 지향점으로 설정한 채 작업하게 됐다. 반면 한국화가들은 전통의 틀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시도에 힘썼고, 현대미술의 최신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한·중 역사의 차이를 반영하듯 양국의 작품은 그 모습이 전혀 다르다.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는 전시다. 전시는 내년 2월 16일까지 열린 뒤 중국 베이징으로 장소를 옮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