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시위, 2030 여성 압도적"이라더니…'아이돌 덕후' 주도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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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 탄핵 시위, 2030 여성들의 참여 두드러져"또래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는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응꾸', 근조화환 등 기존 아이돌 덕질 문화, 탄핵 시위서도
지난 7일, 국회 앞에서 벌어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시위에 다녀온 20대 여성 안모 씨가 당시 현장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시위에 참여한 안모 씨는 "샤이니의 '링딩동'이 나오니까 더 신났다. 갑작스럽게 온 거라 응원봉을 못 가져왔는데 다음에는 뗀석기봉(샤이니의 응원봉)을 꼭 가지고 올 거다"고 말했다. 안씨 뿐 아니라 탄핵 집회 현장에서 2030세대 여성들의 대거 목격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집회에 참석한 다수가 2030 여성이었다는 목격담이 국내 뿐 아니라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에서까지 나왔다. 이들의 손에 든 응원봉을 따라 샀다는 정치인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증샷도 이어지고 있다.
계엄 선포로 시작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촉구 시위에서 '아이돌 덕후'들이 활약하고 있다. 2030 여성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덕질 문화'가 탄핵 시위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는 평까지 나오고 있다.
시위 깃발도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 유행하는 '밈'
이번 시위에서 사용된 깃발에는 기발한 문구들로 눈길을 끈 게 적지 않다. 이들 중 상당수가 아이돌 덕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문구라는 반응이다. '계엄? 이것 뭐에요?', '응원봉을 든 오타쿠 시민연대', 'oo아(아이돌 멤버 이름),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 줄게' 등은 모두 아이돌이나 아이돌 팬덤에서 시작된 밈이다. 특히 '이것 뭐에요?' 밈은 그룹 라이즈의 멤버 쇼타로가 어느 팬이 본인의 팬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접 드립'을 보인 것에 대한 답글을 남긴 데에서 유래한 밈으로 유명하다.
아이돌 덕후 '응꾸' 문화, 탄핵 시위에도
아이돌 팬덤 문화 중 하나인 '응꾸(응원봉 꾸미기)'도 탄핵 시위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응원봉은 2016년 박근혜 정부 퇴진 시위와 이번 시위를 비교했을 때 시각적으로 가장 큰 차이로 꼽힌다. 젊은 세대들은 각자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와 대통령 탄핵 촉구를 외치면서 이전과 다른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 '응꾸'는 각자 기호에 맞게 커스터마이징 하는 것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들의 특징이 드러나는 덕질 문화다. 자신만의 팬심을 드러내기 위한 '응꾸'가 탄핵 메시지를 전하는 걸로 바뀌었지만 각자의 개성을 드러낸다는 점은 동일하다. 세차게 흔들리는 응원봉에는 '윤석열 OUT', '탄핵' 등 각기 다른 문구가 붙여져 있다.시위 현장에서 불리는 노래도 민중가요가 아닌 K팝이 주를 이뤘다. 시위 참가자들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 세븐틴 유닛 부석순의 '파이팅 해야지' 등 인기곡을 탄핵 정국에 맞게 개사해 불렀다. 응원하는 아이돌의 노래가 나오면 환호하는 모습도 보이고, 노래 사이사이 응원법과 화음을 넣기도 한다.
아이돌 소속사에 보내던 근조화환, 이제는 정치인에게
집회에서는 응원봉이 화제라면, 집회장 밖에서 근조화환으로 민심을 전하는 것도 팬덤 문화에서 왔다는 분석이다. "투표하지 않아서 돌아가신 줄 알았다", "투표도 안하는 비겁당, 사망을 축하한다" 등 항의 메시지를 담은 근조화환을 정치인들에게 보내기 시작한 것.지난 7일 야당 주도로 발의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민의힘 의원들의 집단 투표 불참으로 폐기되자, 몇몇 시민들은 "의무를 다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규탄하겠다"며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의 사무실과 당사에 근조화환을 보냈다. 근조화환에 분노하며 이를 부순 사진 역시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근조화환을 보낸 것을 인증한 한 네티즌은 "(아이돌) 소속사에 보낼 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는데, 저렇게 부수며 분노한 모습을 보니 쾌감을 느낀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근조화환 시위는 2006년 충북 청원 오창산단 내 호수공원 개발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해당 군청에 근조화환을 보내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최근에는 아이돌 팬덤에서 엔터테인먼트사나 문제 멤버에 항의하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룹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의 음주운전 논란, 그룹 라이즈 멤버 승한의 복귀를 두고 논란이 있을 때에도 팬들은 각각 하이브와 SM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으로 근조화환을 보내 의견을 전했다.주은우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덕질 문화가 탄핵 시위로 이어지는 현상에 대해 "집회의 효율성이나 지속성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들에게 익숙한 도구를 이용해 즐기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은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드러나는 방식이 다를 뿐 기본적인 시위 목적은 같다. 예전 집회는 엄숙주의적 태도가 지배적이었다면 지금은 다같이 즐기는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며 현 상황을 해석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박수림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