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없이 기업 홀로 뛸 판"…30대그룹 73%, M&A·신사업 미뤄

대기업 60% "내년 사업계획 아직 못짰다"
30대 그룹 CEO 긴급설문

90% "경영환경 더 나빠질 것"
국내 한 에너지 기업 최고경영자(CEO) A씨는 지난주 국내 일정을 접고 미국과 아시아 사업장을 긴급 방문했다. 지난 3일 비상계엄 선포 직후 해외 사업 파트너와 정부 관계자들이 쏟아낸 우려에 직접 답하기 위해서다. A씨는 “대통령 탄핵 등 정치 리스크에 따른 혼란으로 해외 원료 조달 등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해외 투자 계획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닌지 등을 집중적으로 물었다”며 “내년 상반기에 들어설 정부 성향에 따라 에너지 정책이 뒤바뀔 수 있는 점을 반영해 사업계획을 다시 짜기로 했다”고 말했다.

A씨 사례처럼 국내 30대 주요 그룹 중 60%가 내년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했거나 다시 수립할 것으로 조사됐다. 통상 대기업들이 11월 말~12월 초에 다음해 사업계획을 확정한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한국경제신문이 15일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 국내 30대 주요 그룹(금융회사 제외) CEO를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설문조사에서 10곳(33.3%)은 2025년을 보름 앞둔 시점인데도 내년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8개 그룹(26.7%)은 탄핵 등 큼지막한 변수가 생긴 점을 감안해 사업계획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기업은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한 이유(복수 응답)로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등 대외 불확실성 확대’(55.2%)와 ‘탄핵 등 정치 리스크 확산’(44.8%), ‘내수 위축 심화’(31.0%) 등을 들었다.

내년 경영 환경에 대해선 90%가 “올해보다 나쁠 것”이라고 답했다. 이 중 4개 기업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한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네 곳 중 한 곳꼴로 내년 투자 규모와 신규 채용을 올해보다 10% 줄이겠다고 밝혔다.CEO들은 국회와 정부가 가장 시급하게 챙겨야 할 항목(복수 응답)으로 ‘정국 안정을 위한 신속한 조치’(70%), ‘환율, 증시 등 금융시장 안정 조치’(70%), ‘상법개정안 등 반기업 법안 폐기’(63.3%) 등을 꼽았다.

탄핵 통과된 날, 삼성 임원 소집…주요 대기업들 일제히 비상대응
내년 최대 리스크 '高관세' 꼽아…탄핵정국·내수부진도 큰 변수로

국내 간판 기업들이 길을 잃었다. 이르면 한 달 전에 확정한 이듬해 사업계획을 토대로 구체적인 실행 전략을 짜야 하는 시기인데 아직도 2025년 사업계획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30대 주요 그룹 중 60%가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했거나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있을 정도다. 도널드 트럼프 2.0 시대 출범으로 대외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수출·내수 동반 부진과 대통령 탄핵에 따른 정치 리스크마저 더해진 탓이다.

‘퍼펙트 스톰’에 휘청거리는 국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산업 패러다임이 뒤바뀌는 중요한 시기에 정치권이 포퓰리즘에 빠져 기업을 옥죄는 규제를 신설하거나 기업 지원 정책을 실기해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4대 그룹 ‘비상 대응’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14일, 삼성전자 주요 임원들은 밤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켰다. 사업 지원 태스크포스(TF) 소속 고위 임원들과 주요 사업부장 등 경영진은 탄핵 통과 이후 시나리오를 점검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대기업 경영진도 일요일 출근에 나서 장시간 회의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탄핵 정국은 기업 입장에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정책 1순위에 올린 트럼프 2.0 시대를 맞아 정부와 기업이 ‘원팀’이 돼 대(對)중국 관세 60% 부과, 반도체 지원법 및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전면 재검토 등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실상 정부 없이 기업 홀로 뛰어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이 15일 30개 주요 그룹 CEO를 대상으로 긴급 설문한 결과 ‘트럼프 정부 출범’은 내년 대내외 변수 중 가장 큰 영향을 줄 항목(90%·복수 응답)으로 꼽혔다.기업들은 탄핵으로 외교·통상 컨트롤타워가 약화한 걸 우려하고 있다. 몇 개월 뒤 바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4대 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앞으로 3~4개월이 미국 정부와의 관계 정립에 가장 중요한 시기”라며 “미국 정부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급등한 환율 불안 심각”

갈수록 악화하는 국내외 경영 환경도 CEO들을 괴롭히고 있다. 내수와 수출이 동반 둔화하고 있어서다. 올 3분기 수출은 2분기보다 0.4% 줄었고, 국내 소비판매도 전년 동기보다 1.9% 감소했다. 그러자 글로벌 투자은행(IB) JP모간은 내년 한국 경제 성장률이 1.7%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달러당 1430원대로 치솟은 환율도 골칫거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국내 기업들의 대외채무는 1761억달러로 지난해 말보다 55억달러 늘었다. 환율이 뛰면 원화로 환산한 기업의 이자 상환 비용이 늘어나 순이익이 줄어든다. 환율이 10% 상승하면 LG화학의 순이익은 5919억원 감소한다. ‘탄핵이 기업 경영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관한 질문에 30대 그룹 중 26곳이 ‘주가 하락과 환율 불안’을 꼽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 성장동력 놓칠 수도

더 큰 문제는 기업들이 당장의 리스크 해소에 전력투구하느라 미래 성장동력을 뒷전에 둘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30개 주요 그룹 중 ‘내년 인수합병(M&A)이나 신사업 진출 계획이 있다’고 답한 곳이 8개(26.7%)에 그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4곳(46.7%)은 ‘없다’고 답했고, 나머지 8곳(26.7%)은 ‘2026년 이후 검토’를 택했다. 지난 9일 하루에만 350억달러(약 50조원) 규모 M&A가 성사되는 등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고 있는 미국 기업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산업계에선 기업의 투자 의욕을 북돋고 투자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반도체·인공지능(AI)산업 지원법, 석유화학 등 한계 사업 구조조정 정책이라도 계획대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경제단체 고위 관계자는 “정책 지원을 실기하면 그 여파는 두고두고 한국 경제에 부담을 줄 것”이라며 “첨단산업 지원법은 정국 혼란과 무관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정수/김우섭/김진원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