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원의원 간첩사건 수사결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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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계입문 및 국회침투
# 서경원은 87.12 중순 서독 북한공작원 성낙영으로부터 "지금이 적기이니
차기 국회에 진출하라"는 지령을 받고
- 가톨릭 농민회장 임기가 88.2 만료되면 그만큼 영향력이 약화되어
농민운동을 확산시킬 수 없다고 판단, 제도권에 들어가 합법투쟁공간을
확보하여 북한의 지령사항을 수행해야 겠다고 생각,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심하였음.
# 87.12 중순 대통령선거 기간중 "야권후보 단일화 추진 및 김대중후보
지지" 연설등 정치활동을 해오다 주위로부터 가농회장이 정치활동을 한다는
비난여론이 대두되자 88.1 가농회장을 사임하고 재야 통합모임인 "범민주
정치세력 통합추진협의회" 결성에 가담하는등 활동을 하였으며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88.2 평민당에서 영입문제가 거론되자
- 현 평민당 문동환의원 및 정상용의원, 정책기획실장 임채정등 재야정치
지망생들과 협의, 평민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고
- 평민당 입당후 전남 함평, 영광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당시
현역의원 이진연 (59)과 경합, 공천심사위원회에서 결정을 보지 못하고
김대중총재의 결정으로 공천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음.
# 평민당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한 서경원은 북한공작원 성낙영에게
선거자금지원을 요청, 그가 재독유학생 정명영 (39) 을 통해 보내준
8,000마르크, 전 명동성당 청년연합의장 기춘 (30)을 통해 보내준 18,000
마르크등 서독화 26,000마르크 (한화 1,100만원 상당)와 평민당 지원금
등으로 선거운동을 하여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합법적으로
국회에 침투하였음.
# 서경원은 국회의원 당선 2-3일 후인 88.4 말경 서독 북한공작원 성낙영에게
전화, 당선사실을 알리자 성낙영으로부터 "축하합니다. 김신부님 (조평통
간부 김모) 이 아주 기뻐하십니다. 앞으로 훌륭한 일을 해주십시요"라는
내용의 축하인사를 받고 김신부님에게도 감사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였음.
3. 2박3일간의 밀입북활동
가. 밀입북 경위
# 서경원은 88.6초 재독 북한공작원 성낙영으로부터 "당선을 축하한다.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85.4 및 86.4 얘기한 계획 (입북계획을 음어로 통화)
을 세워보자"는 전화를 받고 합법적으로 출국, 평양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중
- 88.6초 전 가농평화통일위원장 이건우 (57) 로부터 동경에서 개회되는
"식량자급을 위한 국제심포지움"에 참가하자는 권유를 받고 이 기회를
이용, 입북하기로 결심하고 입북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심포지움
개최전에 입북일정을 마친후 동경에서 이건우등과 합류해야 한다고 판단
- 비서 방양균에게 일본, 미국, 프랑스등 입국비자를 신청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88.6말경 성낙영에게 전화, "8.26 일본에서 개최되는 식량문제
심포지움에 참석해야 되므로 그 이전으로 계획을 세워라" "뉴욕에서 재미
한국청년연합이 주최하는 8.15 기념행사에도 참석할 예정이다"라고
통보하고
- 그로부터 "일본 세미나 참석전에 계획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겠으며 미국에서
만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자. 미국도착시간을 알려달라"는 연락을 받았음.
# 88.7.4 국회의장 명의의 해외여행추천서를 받아 7월중순경 여권 및 비자를
발급받고 성낙영에게 8.10 LA에 도착한다고 연락한 후
- 8.10 출국 LA에 도착하여 미리 미국에 와있던 성낙영과 재미 친북인물
윤한봉 (41)이 대표로 있는 LA민족학교에 도착, 여장을 푼뒤,
- 성낙영으로부터 "평양행이 준비되었다. 8.16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여
체코 프라하행 탑승구에서 기다리면 유고에서 만났던 북한사람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그를 따라 가면된다"는 구체적인 접선계획을 듣고 프랑크푸르트행
항공권을 받았음.
# 서경원은 88.8.16까지 미국에 체류하면서 북한전위조직인 "재미한국
청년연합" (한청연) 회원들과 국내 정치상황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 특히 8.12-8.14간에는 뉴욕 커뮤니티 연합 감리교회에서 "한청연"주최로
친북교포 200여명 참석리에 개최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해외동포
대회"에 참석하고 UN본부앞에서 흰두루마기를 입은채 "한국분단획책철회"
"농축산물 수입개방 압력철회"등 구호를 제창하며 반미시위를 하였음.
- 또한 미국 메리놀신학대에 유학중인 문규현신부 (40세, 89.6.5 입북)를
만나 그로부터 평양을 가고 싶다는 말을 듣고서는 "평양에 갔다가
휴전선을 통해 돌아오면 좋을 것이다. 금년 1월경 함께 가자"라고 격려
하기도 했음.
# 서경원은 88.8.16 성낙영에게 재차 북한공작지도원 접선요령을 확인,
그로부터 "프랑크푸르트 공항내 체코 프라하행 탑승구번호를 기재한
메모지"를 받은 다음
- 동일 자정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도착하여 곧바로 성낙영이 메모해준 탑승
구로 가서 86.4 유고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만난 북한공작지도원 "40대 이모"
등을 접선하고 그들이 제공한 "김철수 명의의 북한 공무여권"을 이용하여
체코 프라하공항에 도착하여 북한 특별기에 탑승, 평양으로 출발하였으며
- 비행기내에서 김일성과 면담시 보고하기 위해 "통일을 위한 방안"제하로
국내정세보고자료를 작성하였음.
# 88.8.18 13:25경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 유고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만난 "조평통" 간부 김 모 (60세 가량)등의 영접을 받고
그의 안내로 대동강변 초대소에 수용되었음.
나. 김일성 면담, 국내정세보고 및 북한 통일방안 동조
# 서경원은 자강도별장에서 휴양중이던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8.19 17:30
비행기로 자강도 초대소에 가서 1박하고 다음날 아침 10:30 김일성별장에
도착, 김일성을 만나 3차례의 포옹과 기념사진 촬영후 김일성으로부터
- "서의원, 우리가 잘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우리와 함께 남조선해방을 위해
농민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훌륭히 투쟁하였고 남조선 정권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아왔다는 사실에 대해 보고를 통해 잘 알고 있소. 공화국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오"라는 찬사를 받고
- "주석님을 뵙고 싶었읍니다. 이렇게 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셔
감사합니다. 잘 쉬고 대접도 잘 받았읍니다"라고 정중히 인사한 후 허담과
북한공작지도원 "60대 김모"가 배석한 가운데 30분동안 면담하였음.
# 동 면담시 서경원은 입북도중 특별기안에서 작성한 메모지 "통일을 위한
방안"을 기초로 하여
- "남한이 경제적으로 성장했다고 떠들어 대나 GNP성장율에 허위가 많아
크게 신경쓸 것이 없다"
- "통일을 위해서는 남한 국민들이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북한이 굶주리고 가난하고 전쟁준비만 하는 나라로 오인하고 있는 점을
빨리 개선시켜야 한다"
- "남한에서는 통일의 가장 큰 장애요인인 반공이데올로기를 타파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지만 야당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하여 투쟁의 한계를 갖고 있고
학생운동도 대중과 호흡이 안맞아 큰일이다"
- "현 평양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평양을 방문하도록 해주고 윤공희
대주교, 지학순주교등 북한출신 성직자들이 자기교구로 돌아가 선교활동을
하게 함으로써 남북교류를 확산, 통일의 시발이 되도록 해야 한다."
- "남북 종자교환을 위해 남북농민대표들이 판문점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
- "평양방송에서 주석님을 "친애하는 수령님"등 틀에 박힌 존칭만 쓰고 있어
남한국민들이 거부반응을 느끼고 있으므로 그 내용을 개선하여 남한국민들
에게 자연스럽게 침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휴전선에서의 군사방송도 이북억양때문에 거부반응을 느끼고 있으니
이남말투로 바꾸고 병사들을 위로하는 방향으로 하면 훨씬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고 국내 정세 및 자기나름의 통일방안에 대하여 보고하였음.
# 이에 대해 김일성은 귀가 어두운 듯 배석한 허담에게 무슨 얘기냐고 수차
확인하면서
- "남과 북이 전쟁상태에서 통일을 하자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므로
먼저 남조선에서 하는 팀스피리트훈련을 중지하고 불가침조약을 맺어야
하며 그 다음에 현재의 남북 양제도를 인정하는 연방제의 토대위에서
연방위원회 또는 민족최고위원회등을 만들면 된다"
- "외국군대가 떠나야 한다. 불가침조약 체결후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노''
선언은 명분이 없다"
- "우리는 김수환추기경에 대해 관심이 높다. 그리고 종교활동을 해라 하지
마라고 간섭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인들이 결정할 문제이다"라고 말한후
"나는 서의원을 믿고 있겠소. 부디 남조선 해방을 위해 투쟁해주기 바라오"
라고 격려하였음.
# 이에 감읍한 서경원은 소지하고 있던 자신의 전용 메모지에 김일성의
지시사항을 일일이 메모한 다음
- "정말 좋으신 생각이십니다. 저도 평소에 주석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공감합니다"며 "고려연방제 통일방안"등 전적으로
동조하였음.
# 서경원은 87.12 중순 서독 북한공작원 성낙영으로부터 "지금이 적기이니
차기 국회에 진출하라"는 지령을 받고
- 가톨릭 농민회장 임기가 88.2 만료되면 그만큼 영향력이 약화되어
농민운동을 확산시킬 수 없다고 판단, 제도권에 들어가 합법투쟁공간을
확보하여 북한의 지령사항을 수행해야 겠다고 생각,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심하였음.
# 87.12 중순 대통령선거 기간중 "야권후보 단일화 추진 및 김대중후보
지지" 연설등 정치활동을 해오다 주위로부터 가농회장이 정치활동을 한다는
비난여론이 대두되자 88.1 가농회장을 사임하고 재야 통합모임인 "범민주
정치세력 통합추진협의회" 결성에 가담하는등 활동을 하였으며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88.2 평민당에서 영입문제가 거론되자
- 현 평민당 문동환의원 및 정상용의원, 정책기획실장 임채정등 재야정치
지망생들과 협의, 평민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고
- 평민당 입당후 전남 함평, 영광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당시
현역의원 이진연 (59)과 경합, 공천심사위원회에서 결정을 보지 못하고
김대중총재의 결정으로 공천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음.
# 평민당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한 서경원은 북한공작원 성낙영에게
선거자금지원을 요청, 그가 재독유학생 정명영 (39) 을 통해 보내준
8,000마르크, 전 명동성당 청년연합의장 기춘 (30)을 통해 보내준 18,000
마르크등 서독화 26,000마르크 (한화 1,100만원 상당)와 평민당 지원금
등으로 선거운동을 하여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합법적으로
국회에 침투하였음.
# 서경원은 국회의원 당선 2-3일 후인 88.4 말경 서독 북한공작원 성낙영에게
전화, 당선사실을 알리자 성낙영으로부터 "축하합니다. 김신부님 (조평통
간부 김모) 이 아주 기뻐하십니다. 앞으로 훌륭한 일을 해주십시요"라는
내용의 축하인사를 받고 김신부님에게도 감사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였음.
3. 2박3일간의 밀입북활동
가. 밀입북 경위
# 서경원은 88.6초 재독 북한공작원 성낙영으로부터 "당선을 축하한다.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85.4 및 86.4 얘기한 계획 (입북계획을 음어로 통화)
을 세워보자"는 전화를 받고 합법적으로 출국, 평양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중
- 88.6초 전 가농평화통일위원장 이건우 (57) 로부터 동경에서 개회되는
"식량자급을 위한 국제심포지움"에 참가하자는 권유를 받고 이 기회를
이용, 입북하기로 결심하고 입북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심포지움
개최전에 입북일정을 마친후 동경에서 이건우등과 합류해야 한다고 판단
- 비서 방양균에게 일본, 미국, 프랑스등 입국비자를 신청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88.6말경 성낙영에게 전화, "8.26 일본에서 개최되는 식량문제
심포지움에 참석해야 되므로 그 이전으로 계획을 세워라" "뉴욕에서 재미
한국청년연합이 주최하는 8.15 기념행사에도 참석할 예정이다"라고
통보하고
- 그로부터 "일본 세미나 참석전에 계획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겠으며 미국에서
만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자. 미국도착시간을 알려달라"는 연락을 받았음.
# 88.7.4 국회의장 명의의 해외여행추천서를 받아 7월중순경 여권 및 비자를
발급받고 성낙영에게 8.10 LA에 도착한다고 연락한 후
- 8.10 출국 LA에 도착하여 미리 미국에 와있던 성낙영과 재미 친북인물
윤한봉 (41)이 대표로 있는 LA민족학교에 도착, 여장을 푼뒤,
- 성낙영으로부터 "평양행이 준비되었다. 8.16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여
체코 프라하행 탑승구에서 기다리면 유고에서 만났던 북한사람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그를 따라 가면된다"는 구체적인 접선계획을 듣고 프랑크푸르트행
항공권을 받았음.
# 서경원은 88.8.16까지 미국에 체류하면서 북한전위조직인 "재미한국
청년연합" (한청연) 회원들과 국내 정치상황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 특히 8.12-8.14간에는 뉴욕 커뮤니티 연합 감리교회에서 "한청연"주최로
친북교포 200여명 참석리에 개최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해외동포
대회"에 참석하고 UN본부앞에서 흰두루마기를 입은채 "한국분단획책철회"
"농축산물 수입개방 압력철회"등 구호를 제창하며 반미시위를 하였음.
- 또한 미국 메리놀신학대에 유학중인 문규현신부 (40세, 89.6.5 입북)를
만나 그로부터 평양을 가고 싶다는 말을 듣고서는 "평양에 갔다가
휴전선을 통해 돌아오면 좋을 것이다. 금년 1월경 함께 가자"라고 격려
하기도 했음.
# 서경원은 88.8.16 성낙영에게 재차 북한공작지도원 접선요령을 확인,
그로부터 "프랑크푸르트 공항내 체코 프라하행 탑승구번호를 기재한
메모지"를 받은 다음
- 동일 자정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도착하여 곧바로 성낙영이 메모해준 탑승
구로 가서 86.4 유고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만난 북한공작지도원 "40대 이모"
등을 접선하고 그들이 제공한 "김철수 명의의 북한 공무여권"을 이용하여
체코 프라하공항에 도착하여 북한 특별기에 탑승, 평양으로 출발하였으며
- 비행기내에서 김일성과 면담시 보고하기 위해 "통일을 위한 방안"제하로
국내정세보고자료를 작성하였음.
# 88.8.18 13:25경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 유고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만난 "조평통" 간부 김 모 (60세 가량)등의 영접을 받고
그의 안내로 대동강변 초대소에 수용되었음.
나. 김일성 면담, 국내정세보고 및 북한 통일방안 동조
# 서경원은 자강도별장에서 휴양중이던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8.19 17:30
비행기로 자강도 초대소에 가서 1박하고 다음날 아침 10:30 김일성별장에
도착, 김일성을 만나 3차례의 포옹과 기념사진 촬영후 김일성으로부터
- "서의원, 우리가 잘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우리와 함께 남조선해방을 위해
농민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훌륭히 투쟁하였고 남조선 정권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아왔다는 사실에 대해 보고를 통해 잘 알고 있소. 공화국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오"라는 찬사를 받고
- "주석님을 뵙고 싶었읍니다. 이렇게 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셔
감사합니다. 잘 쉬고 대접도 잘 받았읍니다"라고 정중히 인사한 후 허담과
북한공작지도원 "60대 김모"가 배석한 가운데 30분동안 면담하였음.
# 동 면담시 서경원은 입북도중 특별기안에서 작성한 메모지 "통일을 위한
방안"을 기초로 하여
- "남한이 경제적으로 성장했다고 떠들어 대나 GNP성장율에 허위가 많아
크게 신경쓸 것이 없다"
- "통일을 위해서는 남한 국민들이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북한이 굶주리고 가난하고 전쟁준비만 하는 나라로 오인하고 있는 점을
빨리 개선시켜야 한다"
- "남한에서는 통일의 가장 큰 장애요인인 반공이데올로기를 타파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지만 야당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하여 투쟁의 한계를 갖고 있고
학생운동도 대중과 호흡이 안맞아 큰일이다"
- "현 평양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평양을 방문하도록 해주고 윤공희
대주교, 지학순주교등 북한출신 성직자들이 자기교구로 돌아가 선교활동을
하게 함으로써 남북교류를 확산, 통일의 시발이 되도록 해야 한다."
- "남북 종자교환을 위해 남북농민대표들이 판문점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
- "평양방송에서 주석님을 "친애하는 수령님"등 틀에 박힌 존칭만 쓰고 있어
남한국민들이 거부반응을 느끼고 있으므로 그 내용을 개선하여 남한국민들
에게 자연스럽게 침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휴전선에서의 군사방송도 이북억양때문에 거부반응을 느끼고 있으니
이남말투로 바꾸고 병사들을 위로하는 방향으로 하면 훨씬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고 국내 정세 및 자기나름의 통일방안에 대하여 보고하였음.
# 이에 대해 김일성은 귀가 어두운 듯 배석한 허담에게 무슨 얘기냐고 수차
확인하면서
- "남과 북이 전쟁상태에서 통일을 하자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므로
먼저 남조선에서 하는 팀스피리트훈련을 중지하고 불가침조약을 맺어야
하며 그 다음에 현재의 남북 양제도를 인정하는 연방제의 토대위에서
연방위원회 또는 민족최고위원회등을 만들면 된다"
- "외국군대가 떠나야 한다. 불가침조약 체결후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노''
선언은 명분이 없다"
- "우리는 김수환추기경에 대해 관심이 높다. 그리고 종교활동을 해라 하지
마라고 간섭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인들이 결정할 문제이다"라고 말한후
"나는 서의원을 믿고 있겠소. 부디 남조선 해방을 위해 투쟁해주기 바라오"
라고 격려하였음.
# 이에 감읍한 서경원은 소지하고 있던 자신의 전용 메모지에 김일성의
지시사항을 일일이 메모한 다음
- "정말 좋으신 생각이십니다. 저도 평소에 주석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공감합니다"며 "고려연방제 통일방안"등 전적으로
동조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