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종교적으로는 "살아있는 신"인 달라이
라마는 중국에 강점당해있는 티베트의 바람이 변하기를 기다리면서 지난
30년동안 외로운 망명생활을 해오고 있다.
지난 1959년 중국점령군에 항거하는 유혈폭동이 실패한후 그해 3월말
수도 라사를 탈출한 달라이 라마는 망명이래 해발 1,800m고지에 있는
인도의 한 소도시 다름살라에서 대부분의 망명생활을 해오고 있다.
*** 30년망명생활 비폭력독립운동 ***
금년54세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자유를 위해 전개해 오고 있는
비폭력운동은 광범위한 동정과 지지를 얻었으며 그를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자유투사"의 한사람으로 만들었다.
현재 인도에 망명해 있는 약 10만명의 티베트인들을 포함하여 전체
티베트국민들로부터 정신적 및 종교적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중국당국과의 대화재개노력이 비록 정체상태에 빠져있기는
하지만 언젠가 고국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지난 88년 스타라부르에서 행한 한 연설을 통해 티베트의
완전독립을 요구해온 종래의 입장을 대폭 양보한 타협안으로 중국이
티베트의 외교와 국방을 계속 장악하되 티베트에 제한적 자치를
허용할 것을 제의했었다.
그러나 지난6월의 북경민주화요구시위를 중국군이 유혈진압한 후
중국과 진행해오고 있는 간접접촉은 별로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중국군의 북경시위진압은 지난 87년 9월에 시작된 티베트의 독립요구
시위를 중국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한 후에 발생한 유혈사건이다.
달라이 라마는 지난 9월 다름살라에서 가진 한 회견에서 북경의
보수파와 어떤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1935년 7월6일 티베트의 칭하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
달라이 라마는 지난 1935년 7월6일 중국과 접경한 티베트의 칭하이에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6명이었으나 형제자매중 9명은 출생직후 사망했다.
그는 두살반 되던해 때마침 마을을 방문한 라마승들에 의해 "부처의
회신"으로 인정되었고 네살반 되던 해에는 이같은 사실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그는 이어 라마승들에 의해 수도 라사로 옮겨져 지난 1933년에
사망한 달라이 라마의 뒤를 이어 1940년 2월22일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정식책봉되었다.
그러나 지난 1950년 중국군이 티베트를 무력침공하자 히말라야에 있는
티베트와 시킴왕국의 국경지대로 피신했다가 51년 중국과 티베트간의
조약체결에 따라 수도로다시 돌아왔다.
그는 그러나 지난 1956년 인도에서 거행된 부처탄신 2,5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후 인도에 계속체류할 것을 희망했으나 당시의 자와할랄
네루 인도총리는 그가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 자기가 티베트국민을 도울수
있는 최선의 길을 열어줄수 있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라마교의 최고수장이라기 보다는 앳되고 행복한
학생처럼 보여 티베트국민들에게 영웅적인 인물로 비치지 않았으나
59년3월17일 라사를 탈출해 험준한 히말라야의 산과 강을 넘는
장장 2,560km에 달하는 대장정탈출을 감행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비쳐져왔던 자신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그의 라사탈출 직전인 3월13일 티베트내각은 51년에 중국과 체결한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티베트의 독립을 선포했다.
달라이 라마는 그해 3월31일 8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인도국경을
넘어 망명을 요청했으며 인도는 이 요청을 수락했으나 망명정부수립은
허가하지 않았다.